눈높이를 맞춘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가르치려 할 때 상대의 수준에 맞추어 적절하게 설명하겠다는 뜻이다. 동 취지가 약간 변주되다 보면 '레벨' 즉 수준이란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수준차'란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데 이는 눈높이와는 어감이 다르다.
나는 은퇴 후 주로 연금에 의존해 살다 보니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자연스럽게 소비 규모도 줄어들었다. 필수품은 가급적 할인 행사 때 구입하고, 구매 장소는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을 이용한다. 우리 동네에 다이소가 있다. 그곳은 나의 최애 장소다. 그런데 어떤 글 중에서 "다이소 레벨"이란 신조어를 보고 쓴웃음이 나왔다.
나 역시 돈은 값싸게 지불하지만 제품은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는지 쳐다본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건강상 유해한 성분이 있을까 봐 그런다. 하지만 가격 대비 가성비가 뛰어난 품목이 있는데 볼펜 류다. 선진국 제품 한 자루 값이면 여기서는 한 세트를 살 수 있다. 유감이지만 '값싸고 좋은 제품'은 없다고 믿는 게 편하다.
현역 시절 재치가 뛰어난 상사를 모신 적이 있다. 같이 식사를 하다가 내가 이런 말을 건넸다. “부장님 생선이 심하게 탄 것 같은데 먹지 말죠?” 상사님 왈 “탄 음식이 암으로까지 발전하려면 최소 수 십 년 이상이 소요되걸랑, 내 나이 육십인데 그때쯤이면 자연사 시기와 얼추 맞을걸, 그냥 먹을래!” 참 낙관적이었다.
‘그래 우리도 개발도상국 시절 조악한 국산품을 많이 사용했잖아! 지금 별문제 없는 걸 보면 사람이 생각만큼 약하지 않다는 증거지!’라고 중얼거리면서 조금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나도 기꺼이 구매한다. 바로 옆 가게는 찐빵을 판다. 전에 비해 가격이 꽤나 올랐지만 필요 제품을 싸게 구입한 덕분에 그나마 간식거리를 넘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니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학생들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 등골 브레이커란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또한 자녀들이 특정 회사 제품 휴대폰을 소지했느냐 여부가 애들 부모의 수준을 대변한다는 소리도 들었다. 뻐기는 아이들도 그렇고 마냥 부러워하는 애들 모두 우리 기성세대의 작품이다. 온 세상이 물질 만능만을 추구한 결과가 이처럼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으로 투영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방종이 아닌 “제 멋에 사는 세상" 구현에 모두 동참할 필요가 있다.
청소년 시절부터 ‘루저’란 사슬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얽어맨 청년들에게서 미래의 건강한 모습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가난은 자랑거리가 아니지만 역시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주위에는 청빈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적당한 시기심은 발전의 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도가 지나치면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고통의 씨앗을 품게 만든다.
특히, 청년들이 "이생망"이란 말을 자주 입에 올리면 곤란하다. 일단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되면 다시 생명체로 나타날 때까지는 불가의 표현대로 억만 겁이 걸릴지 모르기 때문이고, 게다가 또다시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모든 생명체는 불현듯 나타나서 갑자기 사라지는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삶을 살라는 건 아닐 게다. 하여 좋든 싫든 이번 생을 통하여 승부를 걸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