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돌지 않으면 쓰러지는 게 있는데 바로 팽이다. 만약 더 이상 회전할 수 없다면 용도폐기 대상이 된다. 우리의 신체기능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유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멈추어 서는 순간 길지 않은 여생은 고장 난 모래시계처럼 알갱이가 한꺼번에 쏟아져 내릴 것이다.
얼마 전 방영된 <인간극장>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충남 부여에서 살고 계시는 90대 중반의 부부였고, 방송은 어르신들의 소박하고 일상적인 삶을 조명했다. 두 어른을 보노라니 나의 부모님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분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내 부모님 생전의 모습을 한치 오차 없이 재현해 보이는 듯했다.
자식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의 안위가 걱정되어 가급적 육체적으로 무리하지 말고 행동반경을 줄일 것을 원한다. 타당한 요청이다. 만약 부상 등으로 드러눕게 되면 회복이 어렵고 최악의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마지막 순간까지 움직이고 싶은 본능을 발현하고 싶어 한다.
나도 시골에 계셨던 부모님에게 제발 일 좀 그만하시라는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곤 했다. 부모님은 늘 그러마고 약속했지만 거짓으로 한 약속임을 알고 있었다. 고향을 방문하면 어김없이 애써 지은 농산물을 내 차 트렁크 옆에 산더미처럼 쌓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항상 죄책감이 들었다.
속이 상하여 어떤 때는 일부러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고향에 간 적도 있다. 나의 강경한 입장을 당신들께 전하고 싶다는 취지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멋쩍어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다. “죽기 전 까지는 손발이 움직이는 한 뭐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라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농작물 새싹이 무탈하게 자라는 걸 바라보는 게 커다란 행복이다."라는 말씀도 하셨다.
지금은 크게 후회하지만 당시에는 ‘일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실 거냐’는 말까지 했다. 현명한 사람은 간접 경험을 통해서도 교훈을 얻지만, 나는 어리석어 그렇지 못했던 관계로 부모님이 세상을 뜨고 나신 후에야 내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부모님이 생각하는 삶의 의미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평생 고된 일만 하셨으니, 이제 남은 여생은 무조건 두 손 놓고 쉬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급작스런 환경 변화는 당신이 평생 지켜온 일종의 “루틴”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부모님 입장에선 꼼지락거릴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이었고 자신이 아직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징표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께서 최소한의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면 가급적 당신들의 선택을 최대한 존중해 드리면 어떨까 한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미리 넘겨짚어 과도한 행위제한 요청은 어른의 행복에 금이 가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누구나 알고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죽는 순간까지 하면서 사는 것이 최고다.’는 수수한 소망 말이다. 어쩔 수 없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은 오히려 신성해 보일 것 같다. 나 역시 이런 모습을 꿈꾼다.
의자에 앉아 글을 읽다가, 예술가가 완성단계에 있는 작품 앞에서, 강연자가 강단에서, 농부가 들판에서 스르르 잠들 수 있다면 어찌 하늘의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