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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 시간을 내 둘러보고 싶은 곳이 있었는데, 사람과 차 구경도 할 겸 선정릉에 다녀왔다. 녹지 공간의 역할도 충실히 하고 역사유적을 관람할 수 있는 명소다. 입장료를 내고 들어섰다. 잠깐 걸으니 오른쪽에 중종의 능이 보인다. 비탈진 언덕의 상층부에 위치한 관계로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아야 했다. 능 윗부분과 석조물만 보인다. 곁에 왕비의 능은 없었다. 제단 옆 비석엔 <조선국 중종대왕 정릉>이라 새겨져 있다.
왕의 생애가 적혀 있는데, 당시 명나라의 영향력이 아주 컸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의 기준이 아닌 “明~年” 이런 식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명나라에 반기(요동정벌 포기, 위화도 회군)를 들지 않았던 보상으로 나라가 존속될 수 있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약소국의 신세는 처량하다. 현재도 중국은 대국다운 모습을 보이지 않고 경제보복을 하는 등 우호적이지 않은 자세로 일관하고 있어 유감이다.
이어서 선릉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이 든 노인들이 건강관리를 위해 분주히 걷는 모습이 보이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인근 직장인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담소 중이다. 한 남성 외국인은 유모차에 애기를 싣고 유유자적 걷는데 표정은 밝지 않다. '배우자와 다투고 난 후 바람 쐬러 나왔나?' 독학으로 영어회화를 공부하고 있는데 이런 기회에 실전경험을 위해 말을 건네 보려다 자신감 상실로 기회를 놓쳤다.
선릉으로 가는 길 중간쯤에 성종의 아내이자 중종의 어머니인 정현왕후 능이 보인다. 남편과 가까이 있지 않고 조금 떨어진 위치다. 왕의 능을 쓸 땐 합장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양복을 차려입은 관람객 한 분이 휴대폰으로 능 주변을 동영상 촬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새 밀짚모양의 모자를 쓴 관리인이 무얼 하나 응시하면서 접근한다. 촬영 금지 등의 안내문은 없는 것 같은데?
드디어 성종의 능에 도착했다. 아들 능과는 달리 측면에서나마 능 전부를 볼 수 있는 위치다. 사진 한 컷 찍었다. 조금 아쉬운 것은 능 바로 옆이 이면도로인데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소음도 심하다. ‘대왕께서 깊은 잠을 들기가 어려워 보인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성종의 인간적인 고뇌를 떠올려 보았다. 왕으로서 재위 기간 중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
성군을 들라하면 세종대왕 다음으로 성종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자신의 부인 (폐비 윤 씨)을 사사(賜死)하게 했고 적장자(嫡長子)인 연산군은 왕조를 통틀어 전대미문의 폭군으로 기록되었다. ‘처자식 복이 많지 않았나 보다.’ 연산군은 폐위가 되는 바람에, 묻힌 곳을 능이 아닌 묘라고 부른다. 도봉구 방학동엔 연산군 묘가 있다. 초입엔 묘의 세월만큼 됐음직한 고목나무(은행)가 덩그러니 보호수란 명패를 걸고 서 있다.
그러면 ‘이복형을 끌어내리고 반정을 통해 집권한 중종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마음만은 새 세상을 열고 싶었겠으나 현실과 타협했다. 집권에 힘을 실어준 사림(士林)들을 모두 제거했다. 급부상하는 신진세력이 두려워서였고, 기득권(훈구세력)과는 적당한 밀고 당기기를 했다. 정릉에 함께하지 못한 자신의 배우자 문정왕후는 어떤가? 친자였던 어린 명종을 대신해 권력을 행사한 주인공이다.
우리는 문정왕후 덕분에 수렴청정(垂簾聽政)이란 말을 알게 되었다. 물론 정상적이지 못한 권력행사 때문에, 통치에 총체적인 난맥상을 드러내어 민초들의 삶이 파탄 나게 했고 임꺽정이라는 불세출(?)의 두령도 이 무렵 출몰하도록 원인을 제공했다.
성종대왕 부부와 아들인 중종, 이렇게 세 개의 능이 있는 곳이 선정릉이다. 이곳을 돌아보며 조선의 당시 상황을 나만의 시각으로 더듬어 보았다. 그 무렵 유럽은 이탈리아를 주축으로 르네상스를 꽃피우던 시절이었고, 조선이 조공을 바치던 명나라는 최강국이었으며, 노략질의 대명사 왜구로 불리던 자들은 기나긴 내전을 끝내고 국내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조선과 명을 흘겨보던 시기다.
반면 우리는 네 번에 걸친 사화(士禍)를 거치면서 철저히 편을 갈랐고, 나라에 커다란 폐해를 끼쳤던 붕당정치도 이때부터 태동하기 시작했다. 국론을 모으지 못하고 강병을 하지 못한 대가는 가혹했다. 결국 선조 재임 중 임진왜란이 터졌고 전국토의 유린과 이곳 두 왕의 능이 훼손되는 비극을 피할 수 없었다. 조선의 혼란은 권력다툼과 국가경영 능력부족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지리적인 위치의 숙명 때문인지도 모른다.
조그만 반도 국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자체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좁은 식견으로 보기에는 ‘연산군 이후부터 조선의 비극적인 운명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무능한 왕조가 대책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지속하는 게 바람직한 일일까? 선릉에 누워계신 성종대왕은 '어린 백성'인 나의 생각에 동의하실까? 대로(大怒)하면서 아무래도 자식을 감싸실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다시 입구다. 약 한 시간 정도 즐거운 상상여행을 했다.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주위는 빌딩 숲이다. 지금의 모습이 어느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을까?... 모든 게,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던 선조들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선대의 강인한 DNA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걸쳐 성취가 가능했던 모습일 것이다.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