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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4.30일은 남베트남이 패망한 날이다. 필자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한 선생님이 수업시간 중에 동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때는 이념이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공산주의는 병립할 수 없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었다. 도미노 이론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일시적으로 술렁거렸다. 당시 북한은 남한사회의 교란을 목적으로 간첩과 무장공비를 지속적으로 남파시켰던 때이기도 했다.
5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베트남 공산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유는, 한 장군의 묘지를 바라보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고자 하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나라 군대의 베트남 전쟁 파병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다. 미국은 전쟁이 장기화하자 우리에게 파병을 요청했다. 불응하면 주한미군철수를 고려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혔다. 박정희 정권은 고심 끝에 국익을 위해 파병을 결정했고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국 만리 일 년 내내 덥고 비가 많은 나라를 향하여 군함에 몸을 실었다.
1964. 9월 최초파병을 시작으로 1973.3월(8년 5개월) 철군 시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이 참전하였고 전사 5천여 명, 부상 1만여 명, 고엽제 피해 5만여 명이란 피해를 입었다. 이 피와 부상의 대가로 우리 경제는 베트남 특수를 누렸고 일부기업은 엄청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동시에 우리나라 최전방의 무기 현대화와 남북대치 상황에서 중요한 실전 경험을 쌓게 하는데도 기여했다.
오늘 얘기의 주인공은 채명신 (1926-2013) 장군 (중장 예편)이다. 황해도 출신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5.16 군사혁명에 참여했다. 혁명 후 군인신분을 유지하다 주월한국군 초대 사령관을 역임(1965-1969)했다. 이 기간 중 전사자는 3천 명에 달한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목사가 꿈이었던 모태 신앙인이었다. 파병 중이던 장병과 현지 베트남 주민들로부터의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계급, 연령, 정치성향을 불문하고 존경받는 원로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외국에 태권도 보급을 위해 노력한 공이 크다고 한다.
동작동 현충원 시설을 간략히 설명하면 독립유공자, 장군, 장교, 사병, 경찰관 외 전임 대통령 묘역으로 구분되어 영령들이 모셔져 있다. 채장군은 규정상 사병 묘역에 묻힐 수 없었으나 생전의 유언으로 베트남 참전용사 중 전사자들이 묻힌 묘역에 같이 잠들기를 진심으로 원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를 검토했고 사후 그의 뜻대로 원하던 장소(사병 묘역)에 안장되었다.
장군의 이러한 결정은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에 흥미롭고 관심이 생겼다. 당신 생전에 여러 차례 들렀던 사병묘역에 자신의 안식처를 마련했고 전선에서 동고동락을 함께했던 노구의 퇴역 장병들이 수시로 그의 묘를 찾고 헌화를 하고 있다. 2번 묘역은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의, 최후의 만남의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참전자들의 나이가 칠십 후반에서 팔십 초반임을 감안하면 현재의 감동적인 모습도 서서히 퇴색할 것이다.
장군은 세상을 뜨게 되면 자신의 부하들과 천상 재회를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 부하였던 전사자들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에 유명을 달리했지만 자신은 천수를 누린 사실이 부담스러워 사죄하고픈 마음이 들었을까? 아니면 그대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오늘날 잘 살게 된 우리의 모습을 설명하러 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장군의 마지막 꿈을 헤아리긴 어렵지만 고통이 없는 그곳에서 모두 평안한 영생을 누리시기 바란다.
월남전에 대한 개인의 추억을 추가로 적어보고자 한다. 내가 살던 마을에도 참전용사가 있었는데 "행옥이 아저씨"라 불렀다. 당시 분위기는 파병경력이 있거나 부상을 입은 상이용사에게는 어지간한 일탈은 눈감아 주던 시기라 그들은 괜스레 두려운 존재였다. 그분을 슬슬 피해 다녔는데 어느 날 친구 몇 명과 함께 아저씨를 정면으로 마주쳤다. 초등생인 우리들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군대용어를 사용했고 난데없이 기합을 주기도 했다. 엉덩이로 숫자를 1부터 100까지 쓰고 나면 풀려 날 수 있었다.
조그만 마을에 그분이 기여한 일도 있었다. 임무를 마치고 귀국 시 커피란 신문물을 들여왔는데 정상적으로 마시는 법을 주민들이 알리가 없었다. 그냥 큰 가마솥에 물을 끓인 후 커다란 커피봉지를 개봉 후 통째로 부었고 마을 사람 모두 모여 바가지로 퍼서 돌아가며 맛을 보았다. 나도 조금 마셔본 기억이 있는데 쓰기만 해서 왜 이런 걸 마시는지 당시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시절 민간에도 유행했던 군가 <맹호들은 간다>는 지금도 부를 수 있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인기 대중가요 중 하나였다. 파병 군인에 대한 소식은 매일 주요 뉴스시간에 방영되었으며 온 국민의 주요 관심사였다. 자식을 이국 땅 멀리 보낸 부모들은 항상 마음 졸였을 것이다. 사이공 함락 시 탈출하느라 긴박했던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보트피플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무고한 양민학살, 라이따이한이란 비극적인 사실도 알게 되었다.
월남전이 끝나고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서 여전히 전쟁이 진행 중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렇고 팔레스타인 분쟁이 매일 아픈 소식을 전한다. 이스라엘 지도자는 자국민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이 인생이다"... 혹시 인간은 학살(제노사이드 Genocide)을 본능적으로 즐기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의문이 깊게 드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