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다'는 말 뒤에 숨은
어린 시절엔 내 모든 버거운 것들에 대하여 '괜찮다.'를 되뇌는 것이 습관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도 어쩔 수 없으니 괜찮다.
친구들에게 어리숙한 애 취급을 받아도 미움받느니 웃어넘기고 말면 되니 괜찮다.
조금 더 응석 부리고 싶지만 정해진 포지션은 '착한 딸'이니까, 괜찮다.
혼란스러운 모든 감정을 이해받지 못한 채 지나보내도 괜찮다.
다른 친구들과 비슷할 수 없는 내가 불만이었다, 그리고 그 비틀린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숨겨대던 내가 싫었지만. 그냥 괜찮은 척 무시하며 살았다.
[ 괜찮다. ]
그때의 내 머릿속 괜찮다며 무수히 내뱉은 그 말들은 전부.
‘나’를 부정하고 얻어낸 거짓 괜찮음이었다.
외면하고 등한시하며. 서럽게 방치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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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는다면 지우고 싶은 단 한 가지는 ‘나’였다.
괜찮은 척만 할 줄 알던, 우악함으로 똘똘 뭉친 나.
괴로운데 허덕이며 어찌할 바 모르는 나.
그런데 도와달라고도,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못하는 ‘나’ 말이다.
정작 내가 파놓은 시궁창에서 발을 디뎌 나올 수 있는 건 나말고는 못하는 일인데.
'괜찮다'는 말 뒤에 숨어 나를 내내 괴롭히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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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동창이 반갑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해 왔다. 그다지 친분은 없었던 친구였는데 왜 그리 내가 반가웠는지는 모를 일이다.
"00 중학교 맞지?"
옆에 있던 내 일행은 아는 사이냐며 물었지만, 난 천연덕스럽게 모른다고 했다. 당황 실린 상대의 내밀어진 손을 보고도 난 무덤덤하게 돌아섰다. 그때의 ‘나’를 아는 사람을 전부 사라지게 할 순 없었고, 모른 척하는 게 유일한 내 해결책이었다 여겼다.
괜찮다 바보짓을 하던 ‘나’만 잊으면 괴로움 같은 건 반복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렇게 나를 내가 지워버리는 것은 익숙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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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긴다. 기억을 잃는 다면 단 한 가지 지우고 싶은 게 ‘나’라니.
없던 일인 것처럼. 아니, 없던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나는, 어린 날의 ‘나’를 온전히 지워버린 채 분명 잊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씩씩하려 노력하고, 종종 예상치 못한 위기에도 태연할 줄 알며, 괜찮지 못한 것에는 적당히 맞서기도 하면서. 취향을 드러내고 좋아하는 일을 찾아 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고, 불리한 것에는 섣불리 발을 내딛지 않는 나름의 약스러움까지 생겼다.
그러다 보니 씩씩해진 나는 불쑥, 이제와 그 시절의 '내'가 가엾다. 아무리 잊은 채 살아간다 해도 나약해질 때 드러나는 나는 영락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니까.
나약할 때의 나는 보기 싫지만 어른이 되어도 종종 혼자 마주할수 밖엔 없다, 그때마다 방치해 닫아버린 문 너머의 어린 ‘나’는 그대로라는 걸 또렷하게 알게 된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고, 나는 나인 채로 그저 멈춰있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기억 끝에 선 그 어린 날의 ‘나’에게, 문득 해야 할 말이 떠오른다.
부정해서 미안했고, 가끔은 떠올릴 좋은 기억도 분명히 존재할 테니 우리 가끔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자며. 어떠냐고. 문을 열고, 벽을 깨부순다.
그러면 적어도 무작정 불행하기만 했던 시절은 없는 것으로 되지 않을까 하고.
기억을 지운다 해도 나는 나일 수밖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나 아니면 굳이 누가 나를 기억하려 애쓸까 싶어서.
늦게나마 이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