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에 대하여
인생에서 우연히 마주하는 것들이 종종 큰 여파를 미치는 경우가 있다. 내게도 그런 나비의 날갯짓이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를 꺼내어 대표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바로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도서가 있었다고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건 아니다. 물론 나의 삶에 영향을 끼친 책들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지금 먹고 있는 커피 한잔의 여유와 배달의 민족을 약간의 고민은 하지만 시킬 수 있는 여유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다. 나의 업은 책을 판매하는 한 서점의 직원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순간은 참 여전히 어이없는 상황이다. 20대 중반을 넘기고 학교라는 그늘에서 벗어나 또 다른 정글로 던져졌을 때 나는 무엇을 하여야 할지 답을 내리지 못했다. 딱히 하고 싶은 것들이 정해져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전공으로 했던 행정학을 살려 공무원을 준비하기에는 끈기가 모잘랐다. 결국 어느 하나 정하지 못하고 다가온 졸업이라는 시간이 찾아왔고 현실에 대한 걱정이 되었다.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약한 양 한 마리가 덩그러니 무리에서 떨어져 불안해하는 느낌을 느꼈다.
물론 그 걱정은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내게 약간의 주어진 유예시간 속에 허비하지 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취업이라는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은 장벽이었다. 불안과 걱정의 눈초리를 피해 집을 나오다 보니 배고픔도 커졌고 외로웠다.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단기알바라도 하자는 마음에 일자리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인생에서 원하는 타이밍에 바라는 것들이 나타나는 행운은 내게 드물었다.
전전긍긍하는 시간 속에 한줄기 빛이 내려왔다. 평소 나름 좋은 관계를 지냈던 지인의 한마디가 바로 그것이었다. 본가에서 운영하는 딸기농장에 이번에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해보려 하는데 일손이 필요한데 사람을 구하기가 녹록지 않았다. 그러면서 툭 던진 요즘 뭐 하냐며 일안 하면 용돈벌이라도 해볼래 나에게 권하였다. 나에게는 정말 천금 같은 동아줄이었다. 일말의 고민 없이 하겠다고 말을 하였다. 그렇게 나는 집에서 당당히 나갈 수 있었고 배고픔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왔다 갔다 하는 길이 멀어 도로 위에서 버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도 내게도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이 있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루는 퇴근길에 나의 고용주 지인이 불러서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나눠먹어라고 딸기 한 박스를 주었다. 좋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들고 약 1시간 반의 시간을 버스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 게 걱정되었다. 하지만 고민할 틈도 없이 내손에는 딸기박스가 들려 적고 그렇게 한차례 버스를 타고 환승하기 위해 또 다른 정류장에서 시간을 기다렸다. 긴 배차시간에 심심함이 들면서 이 거추장한 박스도 잠시 손에서 내려놓고 싶어 어딘가 들어갈 곳을 찾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곳이 바로 나의 첫 정식직장이 되었다. 내가 들어간 곳은 알라딘 중고서점이었다. 황급히 도서를 읽을 수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아 딸기박스를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시간을 때울 책을 찾아보려 서가를 둘러보았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가지고 와서 읽다가 다시 도서 반납대에 나 두고 다가오는 배차시간에 자리를 나가려 했다. 그런데 다시 눈에 무언가가 나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사람구함 네 글자에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두 손에 딸기박스를 들고 카운터에 저 죄송한데 저 구인안내문 보았는데 완료되었는 물어보았다.
내뱉고 나서 조금은 처량한 내 행색이 창피함이 다가왔다. 근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아 지금 면접 보실 수 있으세요 사무실로 따라오시겠어요.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일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나를 뽑아주신 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행색이 웃겼지만 인상적이었다. 무언가 확실한 캐릭터가 있고 그 당시 구인이 되지 않은 자리에 적임자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알라딘 중고서점 울산점에서 1년 정도 스탭을 일을 했고 다시 해가 바뀔 때 정식 매니저는 아니지만 무기한 계약직으로 직급이 변경되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서는 나를 좋게 봐주신 점장님의 추천으로 부산에 생겨난 매니저 공석에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결국 운 좋게 부산 서면점에서 매니저가 되어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히도 내가 일하는 매장이 계약만료가 되어갔고 YES24라는 서점이 중고서점으로 오픈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무언가 변화의 계기가 되겠다 싶어 지원을 하였고 결국 나는 운 좋게 이직을 하였다. 그렇게 2개의 매장을 오픈멤버로 일을 하며 쌓인 내공으로 현재는 대구 반월당에 위치한 매장의 점장으로 일을 하고 있다.
내게 책이라는 것이 업이 되었고 책을 통해 나는 사람을 만나고 인제는 책이라는 것을 만들어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 우연히 시간을 보낼 곳을 찾던 내게 잊지 못할 순간의 찰나가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일어났다. 가끔 마트에서 딸기를 보면 그 시절이 떠올라 피식 미소가 지어진다. 언제가 나의 흩날리는 글들이 모여져 한 권의 책으로 탄생된다면 이 이야기는 무조건 첫 장에 놓아두고 싶다. 책은 내게 운명이었고 가끔은 지긋지긋하지만 애증이 가득한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