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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군 Mar 13. 2024

가여운 것들 -2부

자아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

 

 요 로고스 란티모스는 실험적이며 그 특유의 기괴한 설정은 여전히 생소하지만 묘하게 눈길이 간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인 더 랍스터에서였다. 결혼할 대상을 찾지 못하면 동물로 변한다는 설정은 충격적인 신선함을 주었다. 이번 영화에서도 엄마 이자 자식인 인공에 인격체의 시선에 따라 흘러가는 전개가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영화라는 장르에서 자신만의 실험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가여운 것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맴돌았던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아와 자유의지란 무엇인가였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줄 곧 벨라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변화와 성장의 순간을 마주하면서 몰입하게 된다. 벨라라는 캐릭터는 죽은 자이며 한편으로는 태어난 자이다. 죽은 어머니의 몸에 잉태된 아이의 뇌를 이식함으로 그녀를 어떻게 정의를 한요한가 물음표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답을 내리지 못하며 그녀를 관망한다. 영화 초반 어안렌즈를 활용한 연출 방식은 관찰자로 관객의 시선을 설정하게 만드는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갓윈과 함께 하는 동안은 유아기의 아이 같아 보인다. 보이는 것에 대하여 직관적으로 감정 표출을 하고 그것이 정제되어 있지 않다. 즉흥적이고 본능적인 배설을 한다. 백지장 와 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이야기 내 관찰자로 갓윈과 맥스가 있다. 이들은 벨라의 변화의 속도를 통제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은 예측하기 힘든 생물이고 삶은 수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벨라에게 나타난 덩컨의 존재도 그중 하나이다. 단절되고 한정된 세계는 더 이상 아이의 호기심을 적절하게 조절하지 못한다. 그녀는 자신의 새장을 확장하여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달콤한 속삭임의 맛을 덩컨이 보여주었기에 호기심은 극에 달하게 된다.


 여기서  최초로 벨라는 인간으로서 자유의지를 피력한다. 명확하게 자신은 세계로의 탐험을 통해 확장된 인격체가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외로 갓윈이 크게 반대하지 않고 그녀를 보내주는 모습은 흥미롭다. 자신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여 살아왔지만 벨라는 오히려 자유의 의지를 표출하여 독립을 하고한 모습을 하는 것에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마치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이 투영된 것 같았기에 말이다.



  그렇게 시작된 벨라의 여정에는 충동의 반복이 이어진다. 보고 싶고 해보고 싶고 맛보고 싶다의 굴레에서 그녀가 습득하게 된 것은 원초적인 쾌락이다. 성욕과 식욕에 대한 행위의 체험을 통해 감정의 최고점을 느끼게 된다. 덩컨이 바로 이러한 부분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본능적인 것이 주는 행복을 따라가기를 지향하는 캐릭터이다. 그러기에 덩컨은 바람둥이이고 마치 여유가 있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벨라의 성장에 무너지고 까발려진다.


 인간으로서 느끼는 쾌락의 극치는 본능적인 부분이 강렬하다. 사정하고 먹음으로 느껴지는 감정적인 황홀감은 대단하다. 하지만 인간이 동물과 다른 부분은 절제의 미학과 지적인 호기심에 있다. 참음으로써 맛보는 더 긴 여운의 감정과 또 다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확장의 열망은 성장하고 발전하게 만든다. 벨라 또한 이러한 것들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게 된다.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으며 때로는 혐오스럽게도 느껴진다.  알렉사드리아의 빈민가를 바라보며 감정의 최저점을 느끼게 되는 모습에서 그러한 부분이 잘 표현되어 있다. 더 이상 그녀는 쾌락만을 탐미하지 않는다. 배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철학과 냉소주의에 대한 부분을  느끼고 알게 됨으로 인간으로 지적 호기심이 확장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를 만들기 위한 실험을 한다.



 벨라는 파리에서 매음굴로 매춘을 하게 되면서 경험에 대한 도전을 한다. 사회과 만들어 놓은 규범 속의 명과 암 중 이곳은 어둠이다. 욕망과 타락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세상의 일부분이다. 극 중 마담 스위니가 좋은 것만이 아니라 타락과 공포 슬픔이 온전하고 실질적인 사람으로 만들다고 하며 경험할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벨라는 교감과 공감에 대한 감정을 깨닫는다.


 다양한 경험과 만남을 통해 만들어진 인간으로서의 자아는 벨라를 해방시키게 된다. 극 후반부가 되어서는 답을 내리지 못했던 존재로서의 형태가 아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택을 하면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인격체이다. 그녀의 말미에 하는 선택들은 그런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갓 윈 또한 이러한 벨라의 성장을 인정하며 그녀를 대하게 된다.


 관찰자로 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매우 흥미롭고 공감이 갔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을 한다. 나란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다. 하지만 막상 뚜렷한 답을 내리기보다 회피하고 외면하려 한다. 이 속에는 자유의지는 없다. 그냥 순응하고 망각하면서 안주한다. 더 이상 인간으로서 탐미와 성장을 꿈꾸지 않는다. 나 또한 그러했기에 영화가 던지고 있는 메시지가 공감이 매우 갔다. 가장 불안전한 존재가 자아와 자유의지를 갖는 과정이 묘한 만족감을 주기도 하며 타락과 슬픔을 마주하고 있는 내게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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