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통닭
미련이 남은 것일까 아님 그리움일까 머릿속에서 정돈되지 않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나는 그 속에서 시소질을 한다. 버려야 하는 것인지 추억해야 하는 것인지 말이다. 소심한 내게는 어려운 일이고 회피하고 싶고 망각하고 싶은 순간들이다. 그럼에도 일부는 저울에 놓인 무게들이 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고 잊힘을 명 받는다. 그렇게 남겨진 것들은 더더욱이 애잔하게 그 향기로 나를 각인시킨다.
많지 않은 것들이기에 가끔 그것들을 상기시키고 꺼내 보는 것들이 조심스럽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오갈 데가 없는 나그네이다. 불러주는 이도 찾는 이도 없다. 물론 나를 반겨주는 이들도 많지 않다. 그저 걱정과 근심을 주는 존재로서 안쓰러운 인간이다.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던 적도 있었다. 왜 이러한 상황이 내게 일어났고 나의 시간이 부정당하고 억울하였다. 하지만 그 메아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결국 위로도 정리도 모든 것들은 온전히 내가 하여야 했다. 일이 끝이 나고 오히려 나는 밖으로 나서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생각만 해보았던 공간에 발길도 남겨보고 추억의 순간이 서려있는 곳들도 다시 가보기도 하였다. 시간이 느리게 흐름을 걱정하던 내게 역동적인 삶의 활기가 다시 채워졌다. 그리고 무작정 무엇이든 써보고 해 보자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더 이상 그리 슬프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지쳐있던 나에게 잠깐의 쉼이라는 사치를 삶에 부여시켜 준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이 소중한 순간을 기록하고 의미를 부여시킨다. 생기를 잃어버린 근심 어린 얼굴이 이젠 보기 좋게 변했다는 사람들의 말들을 듣는다. 물론 빈말로 치부되는 인사치레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작은 도약이다. 내가 가는 길이 적어도 즐거움을 선사해 주는 것을 반증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한국인의 소울푸드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들이 꽤나 많다. 뭐가 그리 정신이 깃들여져 있고 애정하는 것들이 많은지 장사치들의 말장난이고 홍보수단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였다. 그럼에도 몇 가지 종류의 음식들은 이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에 수긍이 된다. 그중 단연 탑 오브 탑에 드는 것은 치킨이지 않나 싶다.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그것을 찾고 또 그 속에서 위로받는다. 바삭한 튀김옷을 베어 물고 조심스럽게 나오는 속살에 미소를 자연스럽게 짓게 된다.
치킨의 정형화된 이미지는 프라이드치킨에서 출발한다. 시작의 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19세기 미국 남부에서 이는 출발된다. 당시 인도를 제치고 세계 최대의 면화 생산국으로 발돋움한 이곳에는 노동력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서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이 유입되었다. 그들은 자의로보다는 끌려왔고 노예라는 존재로서 사회적인 최약자로 치부되었다.
이들에게 재산을 가질 권리는 인정되지 않았고 그나마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허용된 것은 닭을 기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특별한 날 기르던 닭을 잡아 요리를 해 먹고는 하였다고 한다. 닭고기를 잘게 썰어 갖가지 향신료와 소금을 버물려 튀김옷을 입혀 튀겼다. 이 요리의 조리 방식은 문화 간의 조합이라고 볼 수 있다. 흑인 노예들의 고향인 서아프리카 기후에서는 음식이 쉽게 상하기에 향신료 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 유럽의 튀김 조리 형식이 이와 결합된 것이다.
이것이 강한 향미가 풍겨지는 미국식 치킨의 탄생을 만들어 내었다. 프라이드치킨이 글로벌화된 것은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하얀색 정장을 입은 사람 좋은 인상을 한 할아버지가 모델인 KFC의 영향이 컸다. 이 회사의 창시자인 커넬 샌드스는 켄터키주의 코빈이라는 마을에서 주유소와 작은 식당을 한 공간에서 운영하였다고 한다. 본인이 직접 요리를 하여 고객들에게 판매하였는데 여기서 가장 핫했던 메뉴가 바로 남부식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사람들의 수요에 따라 이 요리는 발전되었다. 커넬 샌드스는 11가지의 향신료 배합으로 만들어진 자신만의 비밀 양념과 직접 개발한 압력 튀김기를 고안해 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1952년 본격적으로 프랜치 사업을 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KFC의 시초이다. Kentucky Fried Chicken의 약자가 내포하는 의미와는 달리 최초로 문을 연 것은 켄터키 주가 아닌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 시티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KFC 트레이드 마크의 탄생은 커넬 샌드스가 프랜차이즈 사업권을 매각할 때 낸 조건 때문이었다. 그는 하나의 조건으로 로고에 자신의 얼굴을 넣는 것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에게 아는 이미지가 탄생된 것이다. 우리나라에 치킨의 시초는 1970년대 초 닭 한 마리를 통째로 기름에 튀긴 통닭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닭과 기름의 생산이 늘면서 이를 활용한 음식이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미국식 프라이드치킨과는 달리 닭고기를 조각내지도 않았고 향신료를 통한 밑간을 하지 않았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1970년대 말 프랜차이즈 치킨 매장이 생겨나면서 통닭은 치킨으로 변모하게 된다. 1972년 명동 신세계 백화점에서 림스치킨을 시작으로 멕시칸 , 페리카나, 처갓집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브랜드들이 나오게 된다. 시간이 지나 1984년 KFC 매장이 국내에 생기면서 치킨의 인기는 절정에 이르게 된다.
사람들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이 음식에 대한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기름에 튀긴 요리기에 느끼하고 퍽퍽하다는 불호를 외치는 부류들이 나타났다. 이에 우리만의 방식을 고안해서 나온 것이 양념치킨이다. 고추장과 마늘 물엿등을 섞어 매운 달콤한 소스를 만들어내었고 이를 통해 느끼함과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맛을 전달해 주었다. 이로 인해 1990년대 전국의 치킨전문점의 평균 매출을 끌어올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서두에서 치킨을 소울푸드에 넣었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이 음식의 진심이었다. 그래서 양념통닭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발전된 형태를 만들어낸다. 통닭에서 출발하여 치킨이 사람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초창기까지는 통사적으로 한 마리의 닭이 부위별로 조각내어서 있었다. 하지만 각자가 선호하는 부위가 다르기에 한정된 숫자에 아쉬움이 있었다. 그래서 각각의 특정 선호 부위만을 메뉴로 만들어 내는 것을 고안해 내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교촌에서 골드윙이고 이후 다양한 이름과 형태로 나왔다.
한국인들에게 소울푸드라고 부르는 것 이유를 하나 더 이야기해 보자면 특별한 이라는 단어를 들 수 있다. 초창기 치킨이 프랜츠매장으로 형성될 시기에 제조업 노동자들의 일평균 임금은 3,400원이었다. 그런데 치킨의 가격은 2,500~3,000원이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과 맞먹는 고급 음식이었다. 아버지의 월급이나 생일 또는 크리스마스날 먹었기에 특별하고 축화의 요리로서 치킨이 우리에게 인식되었다.
우리가 힘들었던 순간인 IMF에는 퇴직자들에게는 새로운 길이 돼주었고 2002년 온 국민을 축제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때에는 사람들에게 즐거운과 행복으로 곁에 있었다. 그래서 치킨은 소울푸드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는다라고 생각이 든다. 닭다리 한 조각에 시원한 캔맥주를 마시면서 하루의 슬픔도 고단함도 날려진다. 싼 비용대비 우리가 느끼는 행복과 즐거움 위로감은 큰 가치를 선사한다.
마트가 익숙해지고 온라인 배송의 편리함에 상대적으로 배제되는 공간이 있다. 바로 시장이다. 굳이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에게 그곳은 후순위고 이제는 잘 찾지 않게 된 장소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우선 등수는 역치가 된다. 시장을 가고 사람들에게 치이고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의 시끌벅적한 소음을 즐긴다. 평소에는 거부하고 싫어했던 것들을 아이러니하게도 즐긴다. 나 또한 오늘 하루 앞 뒤가 다른 사람처럼 여행자의 신분으로 시장을 느끼기 위해 왔다.
내게는 미련의 도시이자 그리움의 도시인 부산을 다시 방문하였다. 누군가를 만나거나 특별한 용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익숙하지만 지금의 삶의 공간에서는 분리된 곳에서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래서 발길의 방향을 부산으로 맞추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1박의 일정을 잡고 숙소를 예약을 하였는데 평소와는 다른 곳을 선택하였다. 부산역 근처에 모텔과 호텔의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공간을 잡았다.
대게는 이곳을 오게 되면 중심가인 서면이나 관광객들이 많은 해운대 근처를 예매하였었다. 많은 인파들과 도시의 소음이 잘 알고 있는 곳이지만 왠지 여행을 온 느낌을 선사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이번은 귀찮게 이동하는 것도 싫었고 이 도시에 익숙하지만 낯선 공간을 찾고 싶어서 평소와는 다른 선택을 하였다. 그렇게 기차에서 내려 인근의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고 거리로 나왔다.
나의 행선지는 깡통시장이었다. 물론 이곳도 영화 국제시장의 여파로 관광객들이 많기는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장을 오래간만에 가보고 싶었다와 부산에 살며 잘 가보지 못했던 공간의 교집합이 맞아떨어져서 행선지로 선정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3 정거장을 지나쳐서 자갈치역에서 하차를 하였다. 항상 집 밖을 나설 때 유독 달라붙는 우리 집 두 냥이인 봄이 와 조리 때문에 괜스레 이것저것 챙겨주다 늦장 출발을 하였기에 내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는 어둠이 서서히 해를 가렸다.
이곳을 아예 처음 마주하는 것은 아니마 약 4년 넘는 시간 동안 거주하면서 아주 가끔 방문해 본 적이 있다. 그때마다 낯설지만 정겹고 시간의 때가 묻어있는 공간들이 꽤나 매력적이기에 느껴졌다. 그래서 내게는 뭔가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꼭 가보고 싶은 장소도 있었다. 깡통시장은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통조림 등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캔 제품들을 주로 이곳에서 갖다 팔기 시작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기한 물건들을 판매하기에 도깨비 시장이라는 별칭으로도 사람들에게 불려지기도 했다. 요즘에야 아마존이나 해외구매대행이 어렵지 않게 접근되지만 예전에는 깡통시장을 통해 일본 이나 미국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어 사람들이 엄청 몰리는 곳이었다. 현재는 해외제품 판매보다는 이 공간은 야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2013년 전국 최초로 상설 야시장으로 개장되어 19시부터 자정까지 운영되고 있다. 정말 많은 먹거리들이 많고 구경거리들이 많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길 수 있다.
여타의 국내 야시장들을 가보기는 하였지만 이곳만큼 발길이 머무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오랜만이라는 텀사이에 공백이 낯설 것 같았는데 막상 다시 와보니 여전히 볼거리와 즐길거리들이 많았다. 그래서 한참을 그 공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경을 하였다. 그러다 아차 하는 마음에 가보야 할 장소를 상기하였다. 그렇게 시장에서 벗어나 조금은 으스스한 골목으로 들어가 한 가게 앞에 도착하였다. 거인통닭이라는 상호명을 보고 설렘과 미소가 지어졌다.
내가 이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골수 롯데팬인 지인을 통해서이다. 부산에 이사 온 지 초창기 적응하지 못하던 나를 이곳저곳 구경시켜 주면서 와본 곳이었는데 정말 인상적이었다. 가게 앞에서 반죽하는 과정과 튀겨지는 모습을 보면서 절로 군침이 돌고 이곳의 치킨은 정말 맛이 있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방문하여 포장을 해서 가기 위해 미리 결제를 하고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약 15분 정도가 걸린다는 사장님의 말을 듣고 한편에서 기름에 익혀지는 닭을 구경하였다. 장인의 모습은 군더더기 없는 동선과 행동을 통해 일사 분란했다. 그것에 오묘하게 집중되다 보니 어느새 기다림의 시간은 지나쳐갔다.
맛있는 온기를 머금고 있는 후라이드 치킨을 들고 기쁜 마음으로 숙소에 돌아왔다.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세팅하고 보니 뭔가 빠진 것이 느껴졌다. 맥주가 없다니 이것은 아니다는 생각에 허겁지겁 편의점에 가서 캔맨주를 하나를 구매하여 왔다. 드디어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부산스러운 몸짓에 아쉽게도 온기는 사라졌지만 상당히 풍성한 양의 치킨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자. 일단 입가심을 위해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켰다.
육안으로 보아도 바삭함이 느껴지는 외피에 한 조각을 집어 입안으로 넣었다. 바사삭바사삭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왔다. 적당한 기름기와 염지가 적절히 되어서 그런지 짭조르만 한 맛이 혀끝에 전달되었다. 더불어 약간의 카레향이 뒷맛으로 느껴졌다. 처음 마주했던 순간이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변치 않은 것 같았다. 물론 물가의 상승으로 가격은 상승했지만 정말 풍성한 양에 비하면 그것이 그리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니었다.
포장을 기다리는 동안 지켜본 모습을 보니 세 개의 가마솥에서 차례차례 튀김의 과정을 거쳤었다. 아마 이전 전주에서 먹었던 진미집 돼지불고기처럼 불 세기를 조절하는 의도와 유사해 보였다. 수고스러운 과정은 항상 그만큼의 맛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느끼지 않고 겉바속촉의 식감에 치킨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부산에서 지들과의 시절이 지금은 내게는 눈앞에 없지만 내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왠지 그리움에 보고 싶다는 말을 혼잣말로 내뱉어 보았다.
희미해져 가는 순간이 잦아지고 기억이 사라져 가는 것이 때로는 슬프다. 그 시간은 돌이켜보면 참 뜨거웠고 행복했었다. 그래서 추억을 상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반갑다. 기억이라는 잔에 한가득 채워진 그리움은 정말 맛이 났다. 항상 글을 쓰면서 고민이 되면서 망설이는 부분들이 있다. 내가 엄청난 미식가도 아니고 전문가도 아니기에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거짓으로 여겨지지 않는 건지 걱정이 든다.
이런 고민에 주변에서 충고의 말 들에 근심은 날아갔다. 세상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들은 없다. 그러기에 삶이 즐겁고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자신에 솔직한 것이 중요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조언을 들었다. 극 대문자 I인 나지만 이번 글을 쓰면서 정말 행복한 순간을 쓰다 보니 솔직하게 표현을 한 것 같다. 조만간 나의 뜨겁던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지인들과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아야겠다. 소울푸드에 이 밤이 영화로워지는 순간이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