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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나이가 든다는 것이 …

by 김군

얼마 전,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났다. 모두 바쁘다는 이유로, 아니 핑계로 수차례 미뤄왔던 만남이었다. “한번 보자”는 말은 습관처럼 반복되었고, 말만 무성했던 약속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문득, 원고지 한 장을 가득 채우고서야 다음 줄을 쓸 수 없듯이, 공허했던 말들 끝에 진짜 만남이 찾아온 셈이다.


시간이 흐르며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고, 잡고 있던 추억의 조각들도 점점 희미해졌다. 다른 길을 걷는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데도, 그 거리가 때로는 서운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런 마음을 애써 웃는 말들로 가리고, 의미 없는 농담으로 인연을 붙잡으려 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정말 친밀했던 시절은 그리 길지 않았다. 불타오르듯 가까웠던 시간은 고작 1~2년.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덕분에 지금까지 이어진 인연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이번 약속은 내가 먼저 꺼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시간의 설계를 어느 정도 내가 조정할 수 있었기에, 내가 먼저 시간을 내고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를 비운다는 것이 살짝 아까운 마음도 들었다.

시간은 곧 돈이고, 노력이고, 성과니까. 나는 잠깐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해서 조용히 그것을 내려놓았다.


우리는 각자의 여유를 조금씩 모아 시간을 나누기로 했다. 나는 취향이 크게 다르지 않은 장소를 찾았고, 예약 정보를 공유하면서 마치 숙제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숙제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뿌듯함이 느껴졌고, 오랜만에 누군가를 위해 준비하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기차 시간에 맞춰 이른 아침 출발했다. 나이를 먹으며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시간을 지킨다는 건 곧 마음을 지킨다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날씨 탓인지 기차가 연착됐다. 괜히 초조해졌다. 약속 시간보다 늦을까 봐서가 아니다. 모두가 어렵게 낸 시간을 내가 망칠까 봐, 그게 싫었다. 나는 계속 휴대폰 화면의 시계를 들여다봤다. 다행히 아주 타이트하게, 큰 어긋남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도 던졌지만, 사실 그렇게 웃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웃었다. 공백의 시간이 무색할 만큼 자연스러웠다. 각자의 자리에서 흘려보낸 시간들이 겹쳐지며, 그 시절의 공감이 다시 살아났다.


예전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뒤섞여 왔다 갔다 했다. 얼마 만에 머리가 아닌 가슴에서 웃음이 터진 것인지 모르겠다. 그 순간 문득, 나도 모르게 가슴 한편이 찔렸다. 잠시나마 계산기를 두드렸던 나를 떠올리며, 그 순간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꺼내놓으며 걱정도 하고, 타박도 하고, 칭찬도 주고받았다. 그러다 요즘 자주 회자되는 ‘영포티(Young Forty)’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어느덧 불혹을 넘어선 나이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젊고 싶어한다.


나는 말했다.


“젊게 살려는 모습이 요즘엔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것 같아. 괜히 서글퍼.”


살아온 시간만큼 나이의 흔적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때로는 귀찮음으로, 참을성의 결핍으로, 또는 “하지 않음”으로 나타난다. 사회 속에서 꾸역꾸역 견뎌낸 것들이 내 시간 안에서는 하고 싶지 않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매몰되면 삶은 한 줄짜리 선이 된다. 평평하고, 재미없는.


그래서 나는 번거로움을 한 스푼씩 섞어본다. 핫한 장소를 찾아가보고, 새로운 공간에 발도장을 남긴다. 가끔은 그런 공간에서 내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눈치를 본 적도 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겐 ‘요즘 영포티’의 한 사례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 생각에 살짝 기분이 상했다.


“내 늙음이, 마치 내 잘못인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어.”


그러다 문득, 한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너희 젊음이 너희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그 말을 내뱉으며, 나는 스스로를 조금 감싸안았다. 그리고 우리는 선을 넘지 않는 정도에서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예의’를 지키는 것이 꼰대라 여겨지곤 했지만, 이제는 안다. 벼가 익으면 고개를 숙이듯, 사람도 숙여진다는 것을.


조각난 시간들이 퍼즐처럼 맞춰졌고, 꽤 근사한 하루가 완성되었다. 이 인연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지, 다시 공수표가 되지는 않을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란다. 이 끈이 쉽게 끊어지지 않기를.

그리고 우리 모두가 너무 늙음에 길들여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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