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은이와는 퇴근 후 통화를 하였다. 체념과 또다시 복받쳐 오는 억울함이 공존하며 거칠게 그녀를 갈아먹고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공감과 위로는 한계가 있었다. 눈을 보고 마주 해야 한다. 부서질 것 같은 아니 이미 조각나버린 감정을 만나서 어루만져야 한다.
결국 나는 금요일 퇴근 후 내가 다은이의 매장 앞으로 가기로 하는 것으로 우리의 통화는 끝이 났다. 타인의 슬픔에 물들여진 마음이 쿡쿡 찌른다. 냉장고를 열어 참이슬 한 병을 꺼냈다. 윤서라는 부유물이 마음속에 가라앉기까지 나는 술을 선택했다. 둔감해지려 눈을 감으려 했던 그런 내가 싫었었는데 다시 잡고 있다니 쓴웃음이 났다.
차가운 한잔의 쓴 만이 목을 넘기며 머릿속을 가려준다. 다은이도 J도 그리고 윤서도. 소주병에 바닥이 보일 때쯤 스르륵 쓰러진다. 감긴 눈 사이로 그 무엇도 보이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고요하고 조용하였다.
습관이란 참 무서운 놈이다. 번뜻 새벽 6시에 떠져버린 눈을 쉴 새 없이 비벼되었다. 머리가 지끈 거림과 숙취에 속이 메스껍다. 침대 옆 널브러져 있는 생수 한 병을 벌컥벌컥 마셨다. 불쾌함의 두통이 여전히 잦아들지 않았는다.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온수의 수증기들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송글 송글 물방울이 맺힌 거울을 닦았다. 뽀드득 소리와 함께 비친 거울 속이 모습이 초췌해 보였다.
말끔하게 씻고 나오니 한층 뚜렷해진 정신은 하루의 일과를 예습시켰다 다. 넘겨가는 생각의 장들 속에 다은이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나는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다은이가 길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내가 겪고 있기에 그녀가 나와 같지 않았으면 한다.
출근을 하여 쌓여있던 일들을 정리하였다. 하나 둘 마무리가 되는 업무들은 아이러니하게 마음을 너저분하게 어지럽힌다. 끌려가는 시간 속에서 무엇하나 개운함이 들지 않았다. 한숨들이 겹겹이 쌓여 공간을 잠식시킬 때쯤 퇴근시간이 되었다. 다은이를 만나러 가야 한다.
집에 가서 덕지덕지 붙은 걱정의 흔적들을 씻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애매하였다. 늦지 않기 위해 지하철로 뛰어갔다. 퇴근길 사람들 사이에 피로감이 전달된다. 하루의 끝 사이에서 지친 이들의 감정이 느껴지는 것이 힘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의미 없는 가사에 볼륨을 높였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하였다. 손에 부여잡은 휴대폰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다은이가 시야에 잡혔다. 미처 나를 보지 못한 그녀에게 다가가 놀라게 했다.
"워~ 뭔 그리 보는 거야 아주 빠지겠다. 나 안 늦고 잘 맞춰왔지."
"깜짝이야. 이 씨 간 떨어질뻔했잖아. 용케 지옥철에서 시간 맞춰왔네."
앙증맞게 지어진 주먹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귀여웠다.
" 오늘은 이 오빠가 쏠게. 대신 이 분위기에 파스타 와인 같은 너랑 어울리지 않는 거는 안된다."
" 아니거든 나랑 와인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일단 너무 배고프니까 삼겹살에 소주 콜?"
"당근이지. 된장도 시키고 냉면도 먹어야지. 오늘 끝까지 달려보자."
우리는 고깃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서글픔이 서려진 밤이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