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는 곧 세상이다
두 사람이 만날 때 실제로는 여섯 사람이 만난다
자기 스스로 보는 자기
다른 사람이 보는 그
그리고 각자 실제로 존재하는 자신
by William James
심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는 두 사람이 만날 때 실제로는 여섯 사람이 만난다고 했다.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 실존하는 나
‘나’만 해도 이렇게 세 사람이니 두 사람이 만나면 도합 여섯이다. 그러니 인간관계가 어찌 복잡하지 않을 수 있으랴.
관계란 기본적으로 부딪힘이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입자들 간의 상호작용, 부딪힘 자체가 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 사람과 사람이 부딪혀 이뤄지는 만남, 관계는 세상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이해한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이 '개인'의 내적인 갈등, 리비도에 집중한 1인 심리학이었다면, 그 이후 여러 갈래로 갈라져 발전한 정신분석 이론들은 '관계'에 집중한 2인 심리학이다. 그중 대상관계 이론은 특히 인간관계의 역동적 측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왜 인간관계 이론이 아니고 대상관계 이론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대상이란 용어의 의미를 먼저 알아야 한다.
대상(object)이란 실제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타인을 실제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 자신들이 상상하는 대로 지각한다는 것, 즉 사람들이 타인에 대해 지각한 내적인 표상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우리는 타인에 대한 판타지, 환상을 가진 채로 서로 만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상'의 개념과 어쩌면 비슷하다. 이 판타지는 타인이 내게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마음 안에 갖고 있던 표상이기 내문이다(*표상은 정신적으로 지각된 이미지나 형상 같은 것이다. 의식에 발자국을 찍을 수 있다면 그 흔적이 그대로 남을 텐데, 이때 남은 발자국을 표상으로 이해하면 비슷할지 모르겠다)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이 '대상'에는 각자가 투영한 환상, 공상, 상상이 반영돼 있고, 어떤 환상이 반영돼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과 관계 맺는 모습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이 환상은 우리가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였을 때부터 시작돼 죽기 전까지 평생을 거쳐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가 나 자신을 비롯해 상대방 또한 투명하게 볼 수 없다면, 관계에서 오해는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곳에 항상 잠재돼 있는 지뢰와 비슷하다. 오해가 늘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종종 관계를 미로처럼 또는 흙탕물처럼 어지럽게 하기에 나의 대상관계 패턴을 이해하는 것이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타인을 바라볼 때 작동되는 나만의 환상 공장이 어떤 내용과 메시지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보다 건강하고 자유로운 대인관계를 맺는데 유리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나의 대상관계 패턴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상관계 및 애착 이론에서는 어린 시절 주양육자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것이 대상 관계의 원형이 된다고 본다.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에서 경험한 삶이 고생스러웠던 사람들에게 이건 좀 많이 억울한 얘기다. 하지만 다행인 건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와 우호적인 관계 속에서 자랐다고 해서 모두 긍정적인 대인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아니다. 성인이 된 후에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사느냐에 따라 대상 관계의 패턴도 바뀔 수 있다. 부모와 불안정 애착 관계를 맺은 사람도 노력 여하에 따라 획득된 안정 애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실제 경험 연구들을 통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꽤 오래전에 하버드 대학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삶을 거의 평생에 걸쳐 팔로우업한 연구가 있었다. 아마도 연구 내용이 <행복의 조건> 이란 책으로 출간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구 결과는 단순했다. 대통령, 대기업 CEO 등 수많은 뛰어난 리더들을 배출해낸 하버드에서, 졸업생들의 삶의 행적을 쫓아보니 노년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바로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직업, 건강, 결혼, 돈, 사회적 성취, 명예, 친구 관계 등 인생의 여러 가지 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가까운 관계에서 느끼는 친밀감, 연결감이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책임져야 할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그만큼 현실의 무게가 묵직해지면서 관계는 조금씩 수렴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이십 대, 삼십 대 때는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설레는 기분으로 관계의 장막을 펼쳐가는 시기였다면, 사십 대 이후부터는 넓게 펼쳐진 장막을 거두어 그 안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을 더 가까이 두고 살피고 소중히 지켜보는 때인 것 같다.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우리는 비스듬히, 서로를 기대며 살고 있으니, 다른 비스듬히를 위하여라도, 나의 오늘을 잘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정현종
생명은 그래요.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있나요?
공기에 기대고 서 있는 나무들 좀 보세요.
우리는 기대는 데가 많은데
기대는 게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니
우리 또한 맑기도 하고 흐리기도 하지요.
비스듬히 다른 비스듬히를 받치고 있는 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