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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을 만나면 도망쳐야지, 응?

감정과 욕구에 주의를 기울여라

by 향인
인간이란 아주 신기한 동물이라서 여러 가지에 쓰일 수가 있다. 여러 가지를 하는 데에 대단히 유용하다. 춤을 추게 할 수도 있고 구구단을 외우게 할 수도 있다. 테러를 일으키는 데 쓸 수도 있고 반대로 멋진 건물을 짓게 시킬 수도 있다. 왜 그럴까? 똑똑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지능이 있기 때문에? Nein! 그들에게 감정이라는 이상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사랑을 하고, 증오를 하고, 질투를, 그리움을 갖기도 하고 야망을 갖기도 하며 그에 따른 일련의 좌절을 겪는다. 하여 훨훨 날기도 하고 하루아침에 고꾸라지기도 한다. 아주 온갖 지랄들을 한다. 하여 온갖 일에 써먹을 수가 있는 요상한 생명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0영ZERO零> 중에서, 김사과 소설


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미국 부통령이 각 분야의 한국 여성 리더들과 간담회를 열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중 소설가 김사과 라는 낯선 이름이 눈에 띄었다. 그렇게 우연히 찾아 읽게 된 소설 <0영ZERO零>은 최근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당돌하고 파격적인 문체를 가진 작품이었다.


발췌한 부분은 소시오패스 혹은 악성 나르시시스트로 그려지는 소설 속 화자가 독자들에게 인간과 인간 사회에 대한 자신의 썰을 늘어놓는 부분인데, 감정을 언급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인간이 감정이라는 것을 가졌기 때문에 하늘을 날기도 했다가 한 번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는 요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인간들을 이용해먹지 않으면 오히려 바보라는 놀라운 궤변을 늘어놓는다.


표현이 세긴 하지만 인간이 감정을 가졌기에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작가가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서 아주 날카롭게 통찰해낸 것 같아 자꾸만 곱씹어 생각하게 되었다.


마주하기 두렵고 불편한 진실이지만 세상엔 사람의 나약함을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애초부터 나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서 이용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옆에 있는 가까운 누군가를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가스라이팅을 행하는 일도 많다. 의도적으로 혹은 자기가 하는 게 뭔지 모르는 채.


희망과 두려움, 기대와 실망, 기쁨과 슬픔, 만족과 좌절 등등. 만약 인간에게 이런 감정들이 없다면, 모두가 AI 라면, 사람이 다른 사람을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이용하고 착취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람을 강하게도, 한없이 취약하게도 만드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진화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의 감정은 생존을 위한 획기적인 경고 시스템이다. 위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도록 신호를 보내주는 게 바로 감정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원시 시대 야생 동물의 위협에 늘 노출돼 있던 인간이 뱀, 거미 같은 맹독성 동물, 곰, 사자 같은 육식 동물을 마주쳤을 때 ‘위험’을 느끼고 도망가거나 피할 준비를 하도록 도와주는 게 바로 공포, 두려움이라는 감정이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원시인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낮아질 수밖에 없다. 반대로 오래 살아남는 원시인은 후세에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유전자를 신체적으로 또는 문화적인 방식으로 물려주게 되었을 것이고, 이것이 지금 현대인에게도 전해지게 된 것이다.


감정은 생존에 유리하도록 할 뿐 아니라 인간이 집단, 사회 안에서 쫓겨나지 않고 구성원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한다. 수치심, 죄책감 같은 고급 감정이 주로 그런 역할을 한다. 남들에게 들키면 비난받을만한 일을 했다고 여겨졌을 때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사회 안에서 적응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힘들다. 극단적으로는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이 그 예다.


감정을 진화심리학적으로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대부분 살면서 감정에 치이고 휘둘리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에, 이것이 삶의 주관적 만족감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다. 다만, 이 감정이란 수수께끼를 어떻게 이해하고 다뤄야 하는지를 모를 뿐.


“모든 감정은 타당하다”


심리 상담사들에게 내담자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중에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감정의 타당화’는 반드시 순위 안에 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말로 바꿔 말하자면 ‘당신의 감정이 옳다’, ‘당신이 그렇게 느낄만하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감정의 타당화가 상담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 과정을 통해서 내담자가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욕구들을 발견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에게 중요한 핵심 감정들을 따라가다 보면 그 밑에 가려져있던 욕구도 고구마 캐듯이 딸려 올라온다. 감정과 욕구라는 퍼즐 조각이 제대로 맞춰졌을 때 사람은 자신만의 행복을 선택할 준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의심을 품곤 한다. ‘내가 지금 화가 나는 게 맞나? 지금 기분이 나쁜 게 혹시 내가 예민해서 그런 건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계속해서 의심을 품기 시작하면 이것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자신을 불신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사치처럼 요원한 일일 것이다.


감정을 대하는 모범적 자세는 이를 마치 귀한 손님처럼 환대하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든 긍정적인 감정이든, 어떤 감정이 찾아왔을 때 무시하거나 억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박대하면서 내치지 않고 아주 귀한 손님처럼 환대하는 것. 그리고 감정이 전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 이것이 감정을 대하는 가장 모범적인 자세다.


모든 감정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있고, 그것은 하나의 시그널이 되어 지금 우리 삶에서 우리가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욕구가 무엇인지 가리켜준다. 분노는 지금 내가 뭔가 정당하지 않은 대접을 받거나, 상황에 놓여있다고 느껴질 때 그것을 해결하라는 신호다. 반면 슬픔은 현재 내 삶에 아주 중요한 뭔가를 상실했다는 신호이므로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찾아 나서야 한다. 원시적 감정인 공포와 두려움은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지만, 이들을 계속해서 회피하다 보면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안 맞는 연인, 안 맞는 결혼, 안 맞는 직장 등등. 그러므로 삶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일수록 내 마음속 두려움을 잘 살펴야 한다.




지금 당신 앞에 뱀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피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만약 당신의 감정 인식 능력에 문제가 생겨서 무섭다고 느끼지 못하거나, 그런 것 따위 아무 문제 되지 않는다며 두려움을 회피한다면, 당신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다.


뱀을 만나면 도망쳐야지, 응? 목에 두르면 어쩔…

Illustrated by TY



* 참고도서 :<내 감정이 버거운 나에게>, 안드레이스 크누프 지음, 북클라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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