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와 도토리

책 <유아의 심리적 탄생>

by 향인
- 넌 도토리가 왜 둥근 줄 아니?
- 아니요. 왜 둥근데요?
- 둥글둥글해야 엄마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최대한 멀리 굴러갈 수 있거든.
- 왜 멀리 굴러가야 되는데요?
- 그래야 그 도토리도 큰 나무로 자랄 수 있으니까. 엄마 나무 바로 밑에 떨어지면 그늘에 가려서 햇빛을 잘 받을 수가 없단다. 제대로 클 수 없는 거지.


언젠가 라디오에서 우연히 상수리나무와 도토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누군가의 사연이었는지 아니면 라디오 작가의 프로그램 오프닝 멘트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휴대폰에 이어폰을 꽂고 라디오를 듣고 있었던 것만 기억난다. 단 한 번 들었을 뿐인데 순간 마음에 떠오른 영감이 너무 강력해서 마치 귀를 통해 이야기가 뇌리에 박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가끔 그 이야기 속의 상수리나무와 도토리를 떠올린다. 동글동글 매끈하게 생긴 도토리가 상수리나무에서 떨어져 열심히 부지런히 굴러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내가 굴러가는 도토리가 되어본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굴러왔을까. 충분히 제 속도대로 잘 굴러갈 수 있을 만큼 둥글둥글 잘 닦였나. 엄마 나무로부터는 얼마나 떨어져 굴러왔을까.


이런 심상을 떠올리며 나는 내가 지금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잘 서있는지를, 나만의 인생길을 뚜벅뚜벅 제 힘으로 잘 걸어가고 있는지를 마음속으로 가늠해보곤 한다.



청소년 내담자를 많이 만나던 시절에 여러 다양한 초중고등학생들을 상담하면서 한 가지 개인적인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아는 보통의 상식적 통념으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는 자신감 넘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졌을 것이다'라는 나름의 가설을 가지고 있었다.


근데 아이들을 만나면서 나의 가설을 벗어나는 사례들을 자꾸 발견하게 되었다. 경제적인 형편이나 가정환경, 가족의 정서적인 지지 등의 면에서 아주 열악한 상태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 객관적으로 나은 상황에 있으며, 특히 부모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들 중에서 몇몇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정체감이 희박하다고 해야 할까. 속이 빈 마른 열매의 겉껍질처럼 바스러질 것처럼 허약하다고 해야 할까. 그 아이를 살아있게 느끼게 해주는 고유한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청소년기는 정체감이 아직 발달 중인 시기이고 혼미한 특성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 시기에 있는 또 다른 청소년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특유의 생동감과 후에 고유의 개성으로 자라날 자기만의 느낌이 별로 전해지지 않았다. 이러한 특징이 그저 우울 등의 정서적인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고민이 되지 않았을 텐데 그런 문제와는 결이 다른 것으로 보였기에, 나는 이를 두고 한참 고민했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가족 치료 책을 읽으면서 그때 가졌던 의문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가족 치료의 초기 모델 중 보웬의 다세대 모델에는 “자기 분화”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개인이 타인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에 따라 기능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정신 내적으로는 사고와 감정을 분리하고, 대인관계적으로는 자신을 타인으로부터 분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원가족으로부터 이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온 가족이 감정적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정서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을 미분화 가족 자아군이라 부른다.


어쩌면 내가 만났던 그 몇몇 아이들은 가족이 너무 가깝게 밀착돼 있어서 미처 자기만의 개성을 피워내지 못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님이어서 애정은 듬뿍 주었지만 스스로 세상을 탐색할 수 있도록 적정한 거리에서 놔두고 지켜보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 아닐까.




분리와 개별화는 두 개의 상호 보완적인 발달 경로로 간주된다. 분리는 아동이 어머니와의 공생적 융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고, 개별화는 아동이 자신의 개인적 특성들을 갖추어 가는 것이다.
- <유아의 심리적 탄생> 중, 말러 등



사람의 심리적인 능력은 태어났을 때부터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발달하고 학습하며 길러지는 것이다. 마음의 탄생은 태아가 세상에 출생하는 순간부터 준비되며 신체적 성장과 더불어 주양육자와의 친밀한 애착, 상호작용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말러는 유아가 자율적인 존재가 되려는 욕구와 어머니와의 공생적 융합 관계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구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한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과정 전체를 유아의 심리적 탄생이라 명명하고, 이를 분리-개별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유아의 심리적 탄생은 크게 세 단계에 걸쳐 이뤄진다.


첫 번째는, 정상적 자폐 단계이다. 생후 약 2개월 전의 시기로 이때 유아는 외부 세계의 자극에 거의 반응하지 않은 채 마치 닫힌 알 속에 있는 것처럼 주로 잠을 자고 생리적인 반응만 하며 지낸다.


두 번째는, 정상적 공생 단계이다. 생후 약 2~5개월 시기의 유아는 주양육자를 자신과 구분하지 못한 채 마치 하나의 단일체처럼 여기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앞의 두 단계는 본격적으로 마음이 탄생하는 분리 개별화 과정을 준비하는 사전 단계라고 보면 된다.


세 번째는, 분리 개별화 단계로 이는 다시 네 단계로 나뉜다. 1) 분화 단계 2) 연습 단계 3) 재접근 단계 또는 화해 단계 4) 개성의 공고화와 대상 항상성의 시작 단계로 나뉘는데, 이는 4-5개월에서 30-36개월 사이에 걸쳐 일어난다.


분화 시기에 아기는 마치 알에서 깨어난 것처럼 주위 환경에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연습 단계에 들어서면서 좀 더 본격적으로 주변 환경에 관심이 많아지며 주양육자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재접근 단계에서 유아는 혼자서 걷기 시작하며 이제 주양육자와 자신이 분리되어 있음을 더 확실하게 경험하고, 이로 인해 분리 불안이 더욱 심해진다. 마지막 단계인 대상 항상성 단계에 이르면 유아는 주양육자가 물리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내면화된 그녀/그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을 수 있게 된다.




말러는 유아가 주양육자로부터 건강하게 분리되고 개성 있는 존재로 개별화되는 과정이 인간의 생애 전체를 통해서 반복된다고 말했다.


그 말은 곧 이 과업이 단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죽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분리 개별화라는 주제가 찾아오는 시기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아마도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발달 과업을 앞두고 있을 때일 것이다. 전학, 이사, 유학, 취업, 이직, 결혼, 출산, 이혼, 사별 등등. 내 인생에도 몇 차례의 분리 개별화 과정이 있었을 것이나 모르는 채 지나갔고, 지금은 결혼과 출산 이후 또 다른 분리 개별화의 시기에 들어섰음을 느끼고 있다. 브런치에 글을 쓸 마음을 먹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과정 속에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고 싶은, 또 다른 개성화를 위한 몸부림일지도 모르겠다.


* 다음 연재에서는 각 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피며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적을 예정입니다. 책을 읽어가며 쓰는 과정이므로 드문 드문 올리게 되는 점 미리 양해 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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