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기도 ‘이것‘을 가지고 움직인다

책 <유아의 심리적 탄생>

by 향인

타불라 라사(Tabula Rasa). 라틴어로 '빈 석판'이라는 뜻이다. 영국 경험주의 철학의 핵심을 나타내는 말로 인간은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석판, 마치 흰 종이와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지식은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지며, 타고난 지식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생득 관념론을 부정하는 경험론 철학자들이 17세기 과거에서 현재로 타임머신을 타고 온다면 머쓱해할 만한 사실들이 현대 과학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1990년대만 해도 신생아를 보는 관점은 무능력한 존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유아의 심리적 탄생>에서 말러는 생후 초기 몇 주 동안에 아기들이 경험하는 심리적 발달 단계를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불렀다.


정상적 자폐 단계에서는 외부자극에 대한 리비도 집중이 거의 없다. 유아는 하루의 대부분을 반은 자고 반은 깨어있는 상태로 지낸다. 유아는 주로 배고픔이나 다른 욕구 긴장으로 인해 울음과 함께 깨어나고, 잉여 긴장이 해소되면 다시 잠든다. 유아에게는 심리적 과정보다는 생리적 과정이 우세하며, 우리는 이런 감각 상태를 은유적으로 개념화하여 생후 첫 몇 주 동안에 해당하는 발달단계를 정상적 자폐단계라고 부른다.

<유아의 심리적 탄생> 中, 마가렛 S. 말러. 프렛 파인. 애니 버그만 지음


프로이트는 이를 새 알로 비유하기도 했다. 단단한 알 껍질에 싸여있는 것처럼 외부 자극으로부터 거의 차단되어 먹고 자고 대소변을 하는 등의 생리적인 활동만 주로 하기 때문이다. 이때는 주로 돌봐주는 사람에 대한 자각도 당연히 없다.


생후 약 2개월 전에 해당하는 이 시기의 우리 집 작은 인간을 떠올려보면 정상적 자폐단계의 설명과 대부분은 일치하지만, 그렇지 않은 점도 있었다. 먹고 자고 싸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돌보는 사람에 대한 구별과 인식이 없는 것은 맞지만, 생후 일주일에서 열흘쯤 지날 무렵부터는 눈빛이 점차 또렷해짐과 동시에 주변의 목소리(엄마가 자기를 향해 말하는 소리)에 반응하며 방향에 따라 고개를 움직이기도 했다. 말러의 설명에 따르면 정상적 자폐 단계에서는 그 명칭처럼 사회적 상호작용은 나타나지 않는데, 나와 아기의 경험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최근 십수 년간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실험, 경험 연구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과 다르게 아기들은 태어날 때부터 중력, 지속성, 연속성 등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으며, 사회적 자극들을 기대하고 좋아한다고 한다. 말러의 정상적 자폐 단계 이론과는 달리 신생아들이 외부 자극을 능동적으로 처리한다는 증거들이 다양한 실험을 통해 증명되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배이비스 눈부신 첫해> 이미지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생애 첫 해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 여러 실험 연구들을 소개하는 <베이비스 : 눈부신 첫 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실험 중 하나도 신생아의 능동적인 움직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


노르웨이 생명과학대학에서 생후 24일 미만의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로, ‘신생아들도 목적과 의도를 갖고 움직인다’는 가설을 검증하기 위한 실험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은 보통 팔다리를 허우적 거린다. 모로 반사 등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인 반사반응 때문에 손과 발이 제멋대로 움찔거려 잠에서 깨기도 한다. 때문에 생후 한 달이 안된 신생아들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기 몸을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신생아들이 자기 손을 보기 위해 팔을 눈앞으로 ‘의도적으로’ 들어 올린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큐를 보고 나서 나는 우리 집 꼬맹이의 신생아 시절을 떠올리며, 손발이 허둥대지 않도록 속싸개로 꽁꽁 싸매두었던 것이 많이 후회되고 아쉬웠다. 고 녀석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자기 손을 들어 올려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앞에서 움직이는 게 뭔지 자꾸만 보고 싶었을 텐데. 잘 때가 아닌 때도 주로 속싸개로 싸두었던 것이다. 그래야 안정감을 느끼는 줄 알고.


아기를 키우다 보면 지나고 나서 알게 되는 것들이 많아 후회를 주워 삼키게 되는 일이 많다더니 정말 그렇다.


자폐단계의 과제는 신체 정신적이고 생리적인 기제에 의하여 새로운 자궁 외적 환경에서 유기체의 항상적 평형을 성취하는 것이다.

<유아의 심리적 탄생> 中


마치 어미새의 따뜻한 품 안에서 알을 깨고 부화를 기다리듯이, 갓 태어난 아기는 부모의 꽉 안아주는 행동을 통해 점차 자기 신체를 인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심리적인 자기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신체의 움직임에 대한 자각이 필수적이다. 몸과 마음의 연결은 탄생 순간부터 일찍이 예고된 것이다.




정상적 자폐 단계 다음 이어지는 공생 단계에 이르면 이제 세상 밖에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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