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쓰는 글
나는 가끔 '문'(door)에 관한 꿈을 꾼다. 자주 꾸는 건 아니지만 시기별로 조금 다른 내용과 분위기를 가졌던 것 같다. 집에서 나와 처음으로 혼자 자취하던 시절에는 전면 베란다 창문으로 아기가 들어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 꿈을 꾸었을 때는 상담을 받고, 대학원에서 공부도 하면서 마음이 많이 몽글몽글해졌었다. 나는 그 당시 꿈에 나온 아기를, 창문 턱을 넘어 아장아장 우리 집으로 걸어 들어온 그 아기를, 아기 예수님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꿈같았기 때문이다.
문에 관한 모든 꿈이 따뜻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때는 시커먼 강도 같은 사람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두려움에 벌벌 떨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월세방 주인집 아주머니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기도 했다. 아기가 들어온 때를 빼고 꿈속에서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두려워하거나, 어쩔 줄 몰라하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혼자 살던 시기를 지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지금은 문이 등장하는 꿈을 거의 꾸지 않는 것 같다. 사실 예전만큼 꿈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면도 있다. 현실이 늘 피곤하니 꿈마저도 손사래를 치는 것인지. 아무튼. 꿈을 꾸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문이라는 화두가 떠오른 것은 문득 내가 일종의 문, 문이라고 여겨지는 수많은 메타포들 앞에서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하게 된 건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 때문이다.
최근 아파트 상가에 무인카페가 하나 생기면서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가끔 카페에 가서 한 잔씩 뽑아 들고 산책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인카페에 대한 관심이 생겨 남편과 종종 이야기를 하곤 한다. 밖에서 주로 일하는 남편은 무인카페를 이용할 일이 종종 있는데, 그중에 정말 카페처럼 아늑하게 잘 차려놓은 곳이 있다고, 나중에 근처에 가게 되면 꼭 한 번 들러보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그 근처를 가게 된 일이 있어 남편이 한 번 보고 오라며, 반대편 길가에 잠시 차를 세워놓고 나만 얼른 내려서 보고 오라고 했다. 나는 살짝 귀찮았지만, 알겠다며 아파트 상가 1층 구석에 자리 잡은 카페로 향했다. 이런 음침한 구석에 뭐가 있을까 싶은 곳에 정말 환하고 예쁘게 꾸며놓은 카페가 있었다. 창문가에는 마주 보고 앉은 손님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번 쓱 둘러보고 나오는 것이 너무 민망하게 느껴져 그냥 겉에서만 보고 지나쳐왔다. 창문가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나를 바라보던 손님의 눈빛이 부담스러웠던 걸까.
그렇게 차로 다시 돌아왔는데, 내가 안에 들어가 보지 않고 겉만 보고 왔다는 사실에 남편은 몹시 실망해하는 눈치였다. "안에 들어가서 봐야만 그 분위기가 어떤지 알 수가 있어서 가보라고 한 거야. 정말 밖에서 보는 거랑 딴 세상이거든. 여기 다시 올 일도 없는데 기회를 놓쳤네." 남편 말이 다 맞았다. 할 말이 없어 그저 겸연쩍은 웃음만 지었다. 그리고 잠시 혼자 생각에 잠겼다. 정말 나는 왜 그랬을까? 문 한 번 열고 들어가 보는 것이 뭐가 그리 어렵다고? 며칠이 지나고 나서도 그날의 일이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생각해 보면 나는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는 일에 관해서는 항상 어려움을 느꼈다. 하찮게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일부터, 가깝거나 먼 관계에서도, 새로운 경험이나 도전 앞에서도 항상 문 밖에서 서성이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서성이는 이유는 결국 두려움 때문이다. 내가 잘못하면 어쩌지. 실패하면 어쩌지. 사람들 앞에서 창피당하면 어쩌지 등등. 문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위축이 되고, 나는 내 무의식적 반응에 따라 두려움을 마주하지 못한 채 돌아서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만 하다 미루고 지나친 일들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오랜만에 다시 글쓰기와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문'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을 여는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 보기 위해서 글쓰기 만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