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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Sep 14. 2018

서부극이 21세기에도 살아남는 법

<쓰리 빌보드>를 중심으로 다루다!


"인종말살이 문학과 예술에 의해  신화와 낭만으로 포장한 채 말이야" 라는 슬로우 웨스트 (Slow West, 2015)에 나오는 대사는 당시의 서부뿐 아니라 작금의 웨스턴에도 해당된다. 현재 할리우드 시장에서 웨스턴은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고 사장된 장르이다. 지나치게 명징한 문명과 야만의 대립은 관객을 더 이상 설득시킬 수도 없고, 백인을 개척자로, 인디언을 학살자로 묘사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 


그러나 '서부극의 역사가 곧 할리우드의 역사'라 일컬어질 만큼 연관이 깊다. 그래서 베트남 종전과 더불어 황혼을 맞이했던 카우보이의 신화를 성공적으로 무대를 옮겼었던 전례가 있다. 바로 <스타워즈>, <다이하드>, <스타트렉>, <아바타>, <매드맥스>, <로건> 등이 그 예다. 어떻게 타 장르와 이종교배가 가능했는지를 멋들어지게 설명해준 이가 있었으니 바로 장 르누아르다. 그는 "웨스턴 영화에서 가장 놀랄만한 일은 그 영화들이 모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감독들에게 무한정한 자유를 준다"라 말한바 있다. 


이를 곱씹어보면, 서부극이 어떻게 무협, 사무라이, 스파게티 웨스턴, SF(스페이스 웨스턴), 호러, 액션, 범죄스릴러, 슈퍼히어로 장르에 녹아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럼, 르누아르의 견해대로 서부극의 클리셰를 제대로 비튼 <쓰리 빌보드>을 중심으로 여타 작품과 비교해나가며, 어떻게 시대조류와 조응했는지를 알아보자!     



01. 국경지대      

일단 <쓰리 빌보드>는 상징적인 장소인 '모뉴먼트 밸리'를 보여주는 풀숏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어서 사막 저편에서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오는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는다. 존 포드式 광활하고 파노라마적인 장면을 커트하지도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뭐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서부극에 나오는 국경은 단순한 변경지대가 아니라 제도와 문명을 나누는 경계선이다. 정의도 도덕도 없는 자연 상태이다. 이 경계선의 사람들은 각자 그들만의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예를 들어,테일러 셰리던의 국경 3부작 <시카리오>, <로스트 인 더스트>,<윈드 리버>에서 기막히게 재활용했다. 그중에서도 <시카리오>에서의 화면분할은 단순한 변경지대를 의미하지 않고, 합법적 절차와 현실적 한계 사이의 경계선임을 여실히 보여준 케이스다.     


<쓰리 빌보드>로 되돌아와서 배경이 되는 미주리 주는 남북전쟁 당시 북부 지지자와 남부 지지자가 반반씩 갈린 지역이라 이 역사적 사실을 현대로 끌어왔다. 사건의 피해자이지만, 그 까칠한 성격 탓에 마을의 비주류 취급받는 밀드레드(프란시스 맥도맨드)의 분노는 마을 전체로 전파된다. 이는 포드가 그린 질서와 정의를 상실한 사회와 같다. 동시에 트럼프 집권 이후, 어떤 접점도 이루지 못한 채 갈등과 대립을 반복하는 현재의 미국이기도 하다.      


덧붙여, 21세기에 국경지대를 멋지게 활용한 영화 한 편을 더 소개하고 이번 장을 마무리하겠다. 바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이다.  모스는 안톤 시가의 쫓겨서 부상당한 몸을 간신히 이끌고 미국-멕시코 국경을 넘는다. 마약조직의 멕시코인 하수인들에게 졸지에 죽임을 당하는 모스의 초라한 최후는 광활한 서부 황야를 호령하던 미국의 옛 선조들과 달리 이 영화가 예언하듯 불법 이민자들에 의해 변경이 허물어지고 있다. 괜히 트럼프가 장벽을 공약으로 건 게 아니다.      



02. 카우보이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서부극에 등장하는 폭력은 어떻게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을까?  

이를 알기 위해 공권력은 어떻게 정당성을 부여받았을까? 을 먼저 간단하게 짚어보자.       


토마스 홉스는 사회 내부의 무질서와 범죄, 외부 침략의 위협에서 인민의 생명과 안전,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세속의 신(리바이어던)'이라는 이름으로 공권력에 정당함을 부여한다. 이를 영화로 고스란히 옮겨온 것이 '서부극'이다. 서부의 광대한 황야와 고립된 공동체는 스크린에서 친숙한 공간으로 변형된다. 그 곳에서 문명은 신화화된 영웅을 통해 야만과 부딪힌다. 그 대결 구도를 승리함으로써 국가의 무한한 가능성과 한계가 없는 전망을 하나의 이미지로 각인시킨다. 화면 속 개척정신은 미국 문명의 지속적인 진보를 약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같은 수준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면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경쟁의 목적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이지만, 이런 '자기 보존의 욕구'는 자연법이 만인에게 동등하게 부여한 정당한 권리다. 각자 그 권리를 향유하기 위해 타인에게 폭력과 책략을 쓰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다. 무한 경쟁과 적자생존이 당연시되는 자연 상태에서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정의와 불의도 나눌 수 없다. 이런 선과 악이 모호한 세계관을 점진적으로 발전시킨 스파게티 웨스턴은 '안티 히어로'를 스크린에다 등장시킨다.      


여기서 잠깐, 수정주의 서부극을 설명하기에 앞서, 제도주의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린의 생각을 따라가 보자. 인간의 삶은 다른 종과 마찬가지로, 생존을 위한 투쟁이자 선택적 적응의 과정이다. 그러나 사람은 제도 속에 살면서 과거에서 전승된 정신적 태도에 따라 사유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삶의 환경은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앞서 말한 홉스가 말한 자연 상태에서 출발한 '자경단의 사적 제제' 은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수립하려는 적극적 이론인데 반해 그 안티테제라고 볼 수 있는 존 로크의 법치주의는 국가가 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소극적 이론이다. 


국가의 힘이 점점 서부에도 미치자, 총싸움 밖에 어떤 생계수단도 갖지 있지 않았던 카우보이들은 영웅의 지위에서 물러나버렸다. 바로 셈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나 조지 로이 힐의 <내일을 향해 쏴라>, 세르지오 레오네의 <옛날 옛적에 서부에>의 무법자들은 은행과 철도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들의 사업을 시간과 문명에 의해 미국 밖으로 밀려가서 그곳에서 자신들의 사업을 수행한다. 이런 조짐은 <하이 눈>과 <리오 브라보>에서 일찍이 예견되었다.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구한 구원자가 양립할 수 없음을 말이다.  문명과 문화의 시대로 이행되면서 서부 개척시대가 마무리되고, 서부극 장르 자체의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한다. 이런 장르의 황혼기를 상징하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할리를 변호사에 양보한다.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렇듯 서부극은 낡은 골동품으로 머물러있지 않고, 시대에 발맞춰 변화해왔다.    

  

다시 <쓰리 빌보드>로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 카우보이는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서부극의 영웅처럼 정의를 추구한다. 딸의 성폭행한 범인을 응징하고자 하는 밀드레드는 기꺼이 총을 집어 들고 악당을 처단하고자 길을 나선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이 결말 장면은 분명하게 선인이 악당을 제압함으로써 잠시 위태로웠던 질서를 복원하는 권선징악적 서부극의 전통에 충실하다. 게다가 맥도나 감독이 존 포드와 존 웨인에게 영향을 받은 비정하고 거친 인물상을 밀드레드에 반영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 그녀는 할리우드 여성 주인공이 가져서는 안 될 금기는 어디서 가져왔을까? 최근에 나온 복수극 중 하나인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 2015)>에서 피해자인 (원주민의 피가 섞인 혼혈) 아들을 딸로 바꾸고, 주인공을 아버지에서 어머니로 치환했다. 물론, 카우보이 간의 동성애를 다룬 이안의<브로크백 마운틴 (Brokeback Mountain, 2005)>처럼 터프한 마초이자 이성애자의 상징처럼 신격화된 카우보이를 철저하게 해체하지 않았다. 다만, 성별을 살짝 바꿨다. 존 포드의 <수색대>에서 마사와 조카딸들에게 가해진 폭행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공 이든(존 웨인)을 떠올려보자, 이 얼마나 유쾌한 전복이 아닐 수 없다. 남성우월적인 장르를 여성성이 가장 극대화된 모성애로 바꾼 결정은 정말 탁월하지 않을 수 없다.     




03. 야만인      

웨스턴에서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항목을 다루자, 언뜻 보면, 대부분의 서부극에서 '은행강도' 또는 '아메리칸 원주민'을 적대자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것의 단면은 좀 더 복잡하다. 서부극은 문명과 야만의 기본 갈등에서 여러 대립 요소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즉, 동부 대 서부, 농장 대 사막, 미국 대 유럽, 사회 질서 대 무정부, 개인 대 공동체, 마을 대 황야, 카우보이 대 인디언 등으로 말이다. 이 같은 <문명의 대립> 은 제임스 캐머런의 <아바타>에서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 같이 변주되기도 하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활동된 작품은, 올해 개봉한 이창동의 <버닝>에서의 무산계급과 유산계급의 대조를 들 수 있다.     


최근 서부극의 인물 구성을 기막히기 활용한 예는 테일러 셰리던의 <윈드 리버>라 할 수 있다. 수사관을 외지인으로, 또 다른 주인공을 원주민과 결혼한 백인으로 설정했고, 피해자 역시 원주민과 외지인 2명이다. 이를 통해 원주민은 선하고, 외지인은 악하다는 (서부극의 오래된) 이분법을 아주 쉽게 허물어버렸다.    

  

다시 <쓰리 빌보드>로 돌아와서 사건의 피해자인 밀드레드 뿐 아니라, 딕슨 경관, 마을 사람들 모두 편견선입관에 사로잡혀있다. 이것이 현재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에 해당되는 분노의 실체다. 사람들은 기존의 지배적 사유 습성과 생활양식을 그대로 따르려고 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려고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밀드레드는 사회적 약자다.) 사유 습성과 생활양식을 바꾸고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은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그리고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가족이라 할지라도 어려운 일이다. 거기다 원래 낯선 것은 궁금하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는 호러 장르나 크리처 물을 떠올려봐라!      


이처럼 <쓰리 빌보드>는 분노에 대한 본질을 고찰한다. 미결 사건을 알린 광고판을 붉게 칠한다. 빨간색은 분노와 증오를 상징한다. (광고판을 통해) 분노가 어떻게 소비되고, 우리 사회에서 확대 재생산되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쓰리 빌보드>에서 알 수 있듯이 야만인이 꼭 생명체로 국한시키지는 않는다.   

  


 

04. 총격전      

모든 서부극은 총격전이 필요하다. 서부극의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 영화에서 검술이 빠지지 않듯이 말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못지않게 이 관습을 제대로 비튼 작품은 <스타워즈> 라 할 수 있다. 중세 유럽의 기사와 사무라이 뿐 아니라 루크 스카이워커와 다스 베이더 간의 살부(殺父) 신화를 더해 정서적 깊이도 추가했다. 이는, 개척의 테마와 존 포드式 추격 시퀀스를 끌어온 <매드 맥스> 시리즈와 더불어 ‘스페이스 서부극’칭할 만큼 성공적인 사례로 우리에게 각인되어있다. 총잡이를 전투기 파일럿으로 바꾼 <탑 건>이나 결투를 현대화한 <다이 하드>도 빼놓을 수 없다.     


자, 그럼, 마틴 맥도나의 <쓰리 빌보드>는 이 클리셰(선악과의 대결구도)를 어떻게 어겼을까요? 밀드레드가 광고판에서 비난한 윌러비(우디 해럴슨) 서장은 (서부극에 흔히 등장하는) 부패한 보안관이 아니다. 오히려 신부로 대변되는 공동체의 민의는 유력인사인 윌러비 서장을 보호한다. 밀드레드는 신부에게 "교회에서 발생한 성추행에 당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신은 죄가 없는 거냐?"라고 반문한다. 그리고 의문의 방화에 광고판이 전소되자 밀드레드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고, 딕슨(샘 록웰)이 중화상을 입는다.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사회에서, 그녀는 여성과 유색인종에 공공연하게 가해지는 차별과 폭력에 맞서 분노를 참지 않고 행동했다. 딸을 잃은 엄마는, 우는 대신에, 원망하는 대신에, 자책하는 대신에 범인과 그녀를 방관하는 공동체에 책임을 묻고 싶었다.      


작금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차별과 혐오, 분노와 증오가 일상에서 빈번히 벌어지지만, 대립각을 세울 상대는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여성들 간에도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각 개인마다 경험하는 억압과 특권은 영화처럼 단순하지 않다. 그래서 어렵다.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밀드레드는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 자신도 폭력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카메라는 광고판의 뒷면을 비춘다. 과연 분노의 이면에는 무엇이 숨겨져 있을까?    


 

05. 법질서의 회복       

밀드레드가 상대하는 건 분노와 증오가 만연하고, 차별과 갈등을 두둔하는 대통령을 뽑은 ‘미국’이라는 나라 그 자체다, 이 부분은 차별을 아예 갈등의 동력을 삼은 서부극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처럼도 읽힌다. 마틴 맥도나는 이념적 모순을 극복하는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해법을 구한다. 먼저 분노와 증오에 대한 답은, 레드(케일럽 랜드리 존스)가 딕슨에게 건넨 오렌지 주스 한 잔, 윌러비 서장의 편지에서 “경찰이 되려면 사랑이 필요하지, 총과 증오로는 해결하지 못해”에서 유추할 수 있다. 바로 반성과 용서이다. 솔직하게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했기 때문에 밀드레드와 딕슨이 함께 범인을 잡으러 갈 수 있었다. 


그다음, 갈등과 차별은, 광고판을 재건하기 위해 밀드레드를 도와주는 이들이 흑인 여성, 멕시코 이민자, 소인 제임스 (피터 딘클리지)이었다는 데서 '연대' 임을 쉽게 도출할 수 있다. 이로써 (엔딩에서) 서남아시아에서도 동일한 범죄를 저지른 걸로 보이는 군인을 단죄하러 출발하지만, 실행했을지는 관객들의 상상에 맡겨둔다. 이제껏 '야만'이라며 차별과 배격을 일삼던 서부극은 이제 다른 문명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사적 복수'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 '군중심리와 한판 승부'라는 보다 심층적이고 복잡한 테마를 다루는 경지에 다다랐다. 이런 진화를 일찍이 예견했던 작품으로는 둘 있다. 

    

첫 번째 작품은 폴 토마스 앤더슨의 <데어 윌 비 블러드>로써 개척사를 다룬 서부극의 또 다른 이념적 토대를 정조준 한다. 바로 '청교도 정신(청부 사상)'이다. (이는 개척정신과 더불어 미국을 하나로 묶는 2가지 중요한 이념적 토대이다.) 즉, 청부(淸富) 사상은 아메리칸드림의 사상적 기반이다. 아마도 로버트 알트만의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에 나오는 ‘교회’라는 상징을 폴 토마스 앤더슨은 출애굽기의 구절을 인용해서 종교 뿐 아니라 '가족주의' 와 '자본주의'로 까지 확장했다. 즉, '피와 석유, 기독교'로 상징되는 미국 주류 가치관이 바로 '탐욕'에 의해 굴러간다고 앤더슨은 일갈한다. 이 영화 속에 나오는 다니엘 W. 플레인뷰(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성공' 그 자체에 중독되어 가족도 버린다. 일라이 선데이(폴 다노)는 광신도지만, 신보다 금전 앞에 쉬이 굴복한다. 19세기 말 '아버지, 자본가, 목사'라는 제도적 역할을 통해 일찍이 존 포드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남긴 선례처럼 미국의 이상을 해체하고, 비판했다.     


앞서 <데어 윌 비 블러드>가 사상을 다뤘다면, 체계(시스템)와 정면 대결을 펼친 두 번째 작품을 만나보자, 바로 데이비드 매켄지 감독의 <로스트 인 더스트>이다. 그럼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 마을을 점령한 악당은 누구일까?  놀랍게도 주인공 형제의 총구가 향하는 곳은 ‘은행’이다. 정확히는 사회 구성원 다수를 희생시켜 특정 세력에게 이익을 몰아주는 '지대추구 행위'이다. 영화 <로스트 인 더스트> 속 금융자본은 노동과 혁신으로 이룬 부를 가로챈다. 게다가 석유 채굴을 명분 삼아 삶의 터전을 빼앗아버렸다. 이것은 백인들이 아메리칸 원주민을 착취해서 쌓은 문명사회에서 이제는 백인들 스스로 착취하기 시작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예언했던 노동자-자본가 뿐 아니라 자본가와 독점자본가 간의 착취구조가 발생한다는 독점 이론과도 일정 부분 일맥상통한다.      



06. 서부극의 유산 : 슈퍼히어로 장르의 멘토가 되다.      

이제까지 <쓰리빌보드>를 중심으로 서부영화의 재해석을 통해 이 장르를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음을 알아봤다면, 현재 대세인 슈퍼히어로 장르를 표본삼아 장르 자체의 이종교배에 집중해서 크게 4가지로 구분해서 짧게 설명하겠다.     


첫째, 일찍이 와이어트 어프, 빌리 더 키드를 신격화하고, 주인공과 악당들을 서사적인 영웅으로 변모시키지 않았던가? 이 점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 이 같은 카우보이와 같은 '자경단원'이라는 캐릭터는 슈퍼히어로 장르에게 큰 영감을 줬다. 고전영화 <셰인>은 어두운 술집에서 윌슨과 총싸움 이후로 조이에게 "사람을 죽이는 걸로 먹고 살 수는 없지"라고 말하며 떠난다. 그 바통을 이어받는 <로건>의 울버린도 사회의 위협을 제거한다. 그러나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자신은 공동체의 가치와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 받는다. 그리고 제임스 맨골드는 늙은 울버린의 처지를 점점 시장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서부극 장르의 위치에 절묘하게 위치시킨다.  메시지와 형식, 캐릭터 모두를 일치시킨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둘째, 서부영화는 선과 악이 대립하는 권선징악을 슈퍼히어로 장르에 전수해줬다. 서부영화의 영웅은 아득한 지평선 멀리에서 나타나서 정의를 수호하고, 석양을 향해 말을 타고 사라진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다크 나이트>에서 인용된 죄수의 딜레마는 분명히 선악에 대한 사회실험이였으며, 엔딩에서 배트 포드를 타는 모습은 〈수색자〉와 〈셰인〉를 인용했다.     


셋째, 배트맨에게 로빈이 있듯이 서부영화에도 동료나 친구는 중요하다.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로버트 레드포드), <수색자>의 마틴 폴리(제프리 헌터), <용서받지 못한 자>의 네드(모건 프리먼)는 코믹스의 사이드 킥 (로빈, 배트걸, 할리퀸, 버키, 워머신)에게 한수 제대로 가르쳐준다.      


넷째, <하이 눈> 이후로 등장한 '갈등하는 영웅' 은 내면의 도덕률과 번민한다. 마치 칸트의 정언명령처럼 극단적인 대립 속에서 선과 악을 가르는 아슬아슬한 선을 따라 걷게 된다. 오로지 폭력만이 내면의 그림자를 뿌리 뽑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반영웅을 살펴볼 수 있다. <수색대>의 이든 에드워즈, <용서받지 못한 자>의 윌리엄 머니(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은 그들이 영웅적인가? 라는 물음을 던진다. 여정에 올라 시련에 마주치면 영웅은 그의 심연에 잠들어있는 어둠과 마주한다. 이 어둠은 그가 구원받기 위해 애를 썼던 어두운 과거일 수 있다. 윌리엄 머니는 과거의 어둠에 의해 다시 총을 잡지만, 이든과 마찬가지로 격렬한 총격전을 거친 끝에 그의 그림자를 몰아낸다. 그는 구원을 받고 폭력이 없는 새로운 삶을 얻는다. 놀런의 <다크 나이트> 3부작에서의 브루스 웨인이 걸었던 일들과 놀랍도록 겹친다. 이런 '주저하는 영웅'을 스크린에 소개한 <하이 눈>은 매카시즘에 의해 배제된 시나리오 작가의 반작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늑대와 춤을>은 <아바타>와 <쓰리 빌보드>, <몬태나 Hostiles, 2017>에게 공존하려면, 오직 ‘용서’와 ‘공감’ 뿐이라는 넌지시 일러줬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서부극이 다루는) 이질적인 문명의 대립과 자본주의의 탐욕이라는 주제삼아 펼쳐지는 스펙터클한 카메라운동이 안겨주는 고색창연한 낭만과 액션의 희열이야 말로 서부극의 영화의 영생을 약속한다. 심지어 차별과 편견의 목소리조차도 정치적 올바름으로 탈바꿈 시킬 수 있음을 앞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즉, 할리우드가 창조해놓은 신화 속 어디에라도 서부극의 전설과 동일한 결론을 도출해 낼 수밖에 없다 할 만큼 지금도 활기찬 장르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장르로서의 서부극 발전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설명하고, 과거를 현재에 맞게 재규정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서부극의 역사 자체가 영화문법을 세워가던 과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점이 웨스턴이 여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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