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Films : 20위부터-
<한국영화 TOP 100>의 선정기준을 밝힐 차례가 온 듯 싶습니다. 첫째, 한 작가당 1편을 기준으로 삼되 예외적으로 최대 5편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습니다. 가능한 한 다양한 감독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규정을 뒀습니다. 일례로 임권택 감독은 그의 최고작이라 할 수 있는 <길소뜸>과 <춘향뎐>은 미성년자 노출로 제외되었고, <짝코>도 혹시 초과할까봐 미리 뺐습니다. 이처럼 김기영, 이만희, 신상욱, 이두용, 이장호, 배창호, 이명세, 홍상수, 김지운, 봉준호, 이창동, 박찬욱, 김기덕 감독의 여타 수작들이 이 규정으로 말미암아 제외되었습니다.
둘째,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 표절 의혹이 있는 작품들 <태권 V>, <접속>, <투캅스>, <광해: 왕이 된 남자>, <마의 계단>은 제외했습니다.
셋째, 이 순위는 제가 재밌게 본 순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순위가 높다고 해서 명작이고 순위가 낮다고 해서 졸작이라는 우열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주관적으로 102년 동안 한국 영화계를 풍성하게 했다거나 후대에 조금 더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예상되는 작품들을 선정했을 뿐입니다.
임권택은 <태백산맥>을 준비하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중단하였다. 그때 오래전 읽었던 이청준의 단편이 떠올랐다. 아무도 소리를 듣지 않는 세월이 되었는데도 소리꾼 가족은 귀향한다.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면서 (근대화로 인해) 어떻게 전통이 부서져가고 향수만이 남는지를 비통하게 바라본다.
남북한의 적대적 공생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공작>, <강철비>, <웰컴 투 동막골>, <베를린>, <의형제>, <백두산>, <공조>, <용의자>, <모가디슈> 등의 분단영화의 새로운 서사를 창조했다.
시나리오 사전검열과 촬영분 삭제로 점철된 유신독재의 서슬퍼런 초상화 속에 70년대 젊은이들은 오늘날 청춘의 처지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때는 긴급조치로부터의 억압과 폭력이 있었다면, 지금은 '자발적인 포기'와 '단념'이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나홍진의 연출력은 <곡성>이 '텅 빈 이야기'임을 관객들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눈속임하는 경지에 다다랐다.
<박하사탕>에서 우리는 이창동의 주된 테마는 ‘죄의식’임을 발견하게 된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개인의 비극·파멸을 실험적 플롯은 <내부자들>,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칸 영화제 각본상
<시>는 성폭행 가해자의 가족이 시를 배우는 이야기다. 추악한 세상을 마주할수록 그녀의 내면에 감춰진 속죄와 애도의 마음이 한 행씩 써지도록 말이다. 고결한 시어(詩語)가 부도덕한 사회를 담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단언한다. 즉 마주치고 싶지 않던 부정적인 감정(속죄, 애도, 혼란 등)을 정확히 응시해야만 시상을 얻을 수 있다는 창작의 고통에 빗대어 표현한다.
이창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끌고 와 가해자의 내면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담담히 서술한 셈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면, 추(醜)를 미(美)적인 영역의 하나로 간주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회색지대에서 죄의식을 발견하는 이창동의 마법인 것이다.
할리우드가 오마주한 빗속 액션에서 알 수 있듯이 독창적인 영상미학으로 가득하다.
<괴물>은 몬스터 장르를 통해 한국사를 돌이켜봤을 때, 재난상황에서 정부와 사회가 우리를 지켜줬는지를 되묻는다.
충무로 역사상 최고의 데뷔작은 한국영화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관객들이 '영화'를 관음하는 동안 왠지 일상을 들킨 것 같은 신기한 체험을 제공받기 때문이다.
김소월 시인의 '애이불비(哀而不悲: 슬프지만 울지 않는다)' 정서를 훌륭히 계승한다.
칸 영화제 국제영화비평가연맹·벌칸상
‘한국영화가 도달한 깊이는 곧 이창동 감독이 도달한 깊이’라는 극찬을 들을 정도로 이창동은 국내 리얼리즘 계보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런데 <버닝>은 무라카미 하루키에서 출발해 윌리엄 포크너로 나아간다. 거장의 변신은 아직 판단 내릴 단계가 아니다. 그래서 <버닝>에 관한 판단은 보류 상태다.
칸 영화제 감독상
사랑과 의심이 점점 영원과 미결로 서서히 침식된다.
한국형 모더니즘에 김기영의 <하녀>가 있다면, 한국형 리얼리즘에는 유현묵의 영화를 효시로 꼽아야 할 것이다.
<오발탄>은 한국전쟁 이후 탈출구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상을 통해 전쟁의 황폐함‧비참함을 표현했다. 일제 침략, 분단, 동족상잔, 군사독재 등 트라우마의 연속인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영화 속 한국사회의 공정성 문제가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오발탄>의 선견지명은 시대를 앞서 갔다.
한국 영화의 최전성기, 2003년 같은 해에 만들어진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더불어 한국 영화를 새로운 단계로 진입시킨 작품이다. 관객과 비평 모두를 만족시킨 <살인의 추억>은 동시대의 한국 영화제작자들이 본받고 싶은 교본이 되었다.
그 가르침은 할리우드의 정교하고 치밀한 장르 공식을 쫓지 말고, 살인 사건에 따라 피폐해져 가는 형사들의 심리묘사에 공을 들이라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사건을 감정적으로 다룸으로써, 암울한 사회상을 노출시키는 전략이다.
칸 영화제 그랑프리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더불어 'K-MOVIE'라는 국제적 명망을 가져다줬다. 이로 말미암아 ‘잔인한 폭력 묘사’와 ‘과잉된 감정 에너지’는 이후의 K-MOVIE를 상징하는 요소로 깊이 각인되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작품·감독·극본·국제영화상
앞으로도 세계영화사에 당당히 기록될 우리 영화다.
오늘날 CJ, 롯데, 쇼박스 등 제작사들은 할리우드 장르를 벤치마킹하지 아무도 한국의 고전영화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김기영에게는 봉준호, 박찬욱, 임상수 등 후학들이 끊임없이 존경을 바치고 있다.
대체 <하녀>는 어떤 영화일까? 금천에서 있었던 실화를 토대로 중산층 가정에 하녀가 들어오면서 일어나는 기이한 사건들을 다룬 이 영화는 많은 전문가로부터 한국영화 100년 사에서 정점으로 꼽힌다. 영화는 여성의 성적 주체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기저에는 계급구조가 급변하는 한국사 회상을 강력하게 비판한다. 이것이 오늘날 K-범죄영화의 조상님이 우리에게 남긴 유언이다.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몇 백 년 뒤의 우리 후손들이 경탄해 마지않는 ‘박찬욱 월드’가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을까 궁금해한다면 아마 이 작품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것 같다. 왜냐하면 <박쥐>는 어떤 측면과 어떤 각도에서 봐도 '박찬욱주의'가 잔뜩 묻어 나오기 때문이다.
봉준호 영화는 류성희 미술감독 등 수많은 관계자들의 증언처럼 사전단계(프리 프로덕션)에서 이미 완성된 느낌이 든다. 그런데 <마더>는 기이하고 비틀리고 불규칙한 '틈'을 여러 군데 노출한다. 이는 역설적으로 이전의 봉테일이 다다를 수 없었던 탄력성을 불러일으킨다.
그 결과, <마더>는 우리나라 영상매체에 흔히 다뤄지는 '재벌가의 상속'으로 대표되는 '내 자식'이 최고라는 이기심 혹은 집착이 한국사회 전체를 병들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프닝 '독무'에서 엔딩의 '군무'로 확장함으로써 시각화한다.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밀양>은 세계 영화사를 통틀어 봐도 꺼내기 힘든 주제를 꺼낸다. 송강호는 상실의 고통을 그릴 넓은 캔버스를 제공한다. 그 화폭에서 전도연은 신처럼 죄인을 용서할 수 없는 인간적인 딜레마를 발산하며 온 몸을 불태운다. 결국 구원은 성(聖)의 영역에서 속(俗)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은밀한 햇볕(密陽)’과 같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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