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100장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클래식을 꼽느냐 또는 X가 Y보다 나은지, Y가 Z보다 나은지 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목록을 작성하는데 가장 어려운 점은 X가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앨범보다 더 나은 장점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반 독자들이 알아듣기 쉬운 언어로 기술해하는 점이 고비였다. 물론 공감대를 얻으면 좋겠지만, 독자들과 어떤 매체로도 서로 소통한 적이 없다. 우리는 연령, 지역, 성별, 기호, 취향, 종교, 키, 몸무게에 상관없는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100대 명반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몇 마디를 건네고자 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공통의 열정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 순수한 마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을 뿐이다.
「Blonde」는 프랭크 오션이 살아온 삶의 하이라이트를 그린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외부에서 내부로 주체를 옮겨가지만 역설적으로 MZ세대를 대변한다. 양성애자인 화자를 내세워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겪고 첫 앨범으로 슈퍼스타가 된 일상의 아픔, 성적 경험, 비탄 등을 대중들에게 전달한다.
아트록에 대칭되는 ‘프로그레시브 소울 (아방가르드 소울)’을 21세기에 맞게 업데이트한다. 개인적인 텍스트를 매우 추상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로 묘사한다. 그는 스티비 원더, 비틀즈, 비치 보이스, 프린스의 충실한 제자다. 특히 비치 보이스의 리더인 브라이던 윌슨의 편곡 스타일과 레이어드 보컬 하모니를 적극 활용했다. 기타와 키보드, 리듬 파트는 1960년대 사이키델릭 록처럼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하다.
'Pink + White', 'Solo', 'Self Control'외에 구조가 흐릿하고 보컬은 종종 실종되고, 미니멀하고 변덕스럽다. R&B얼개를 해체하고 힙합 가사와 비트만이 겨우 중심을 잡아준다. 감정을 감춤으로써 강력한 정서적 공감대와 호소력을 지닌다. 이런 인상주의적인 기법은 N포세대의 불안감과 상실감을 대변한다.
「Bitches Brew」의 레코딩 세션은 1969년 8월 18일 오전 8시에 시작되었다. 마일스 데이비스는 우드스탁에서 지미 헨드릭스의 연주를 보고 감명을 받아 작업이 진행되었다. 대부분 오마주가 그렇듯 이 음반도 그 존경의 대상과는 전혀 다른 사운드를 담고 있다. 재즈 록이라기엔 베이스라인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에 더 닮아 있었다. 데이비스는 “퓨전은 의도된 것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라며 다양한 아이디어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였다.
녹음에 참여한 연주자들은 점점 엄격해지는 재즈의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록, R&B, 모달 재즈, 자유로운 임프로바이제이션, 인도와 중동의 스케일을 끌어와 모두가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펼친다. 록과 재즈 뮤지션 사이에 ‘퓨전 재즈’가 던진 혼란스러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Bitches Brew」을 들은 사람들에 의해 마일스 데이비스는 다시금 재즈의 왕좌를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바이블, 랩의 강령은 90년대 초반에 바뀌었다. 스눕처럼 마약에 쩌든 갱스터가 퍼블릭 에너미 같은 정교적 설교자들을 싹 쓸어버렸다. 서부의 G-Funk나 퍼블릭 에너미의 '소음의 장벽'과는 거리가 멀다.
팀의 브레인, RZA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무술영화에서 힙합의 계시를 듣는다. 구식으로 치부되던 옛 소리를 발굴하고 미니멀한 사운드로 랩의 메시지에 초점을 뒀다. 그들의 라임에선 랩에 상투적으로 사용되던 마약, 총, Bixxh 등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들은 무협 용어를 빌려 흑인들의 생사를 두고 난상토론(랩 배틀)을 펼친다. 주류와 반대로 역행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이 투박한 앨범이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시애틀 그런지의 교과서, 펄 잼은 아메리칸 하드록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조류를 받아들였다. 마이크 맥크레디가 블루스적인 섹시한 연주, 닐 영이나 도어스가 연상되는 고조되는 선율적 장엄함과 에디 베더의 풍성한 중저음 보컬은 동시대 그런지/메탈 밴드와는 확실히 차별화됐다. 에디 베더의 인상주의적 가사도 놓칠 수 없다. 너바나, 사운드가든, 앨리스 인 체인스가 추상적인 가사와 달리 미국 사회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 앨범만의 개성이 됐다.
너바나의 <Nevermind>에 비하면 클래식 록의 전통에 더 가깝고, 사운드가든의 <Superunknown>에 비하면 메탈 사운드가 덜 무겁다. 커트 코베인, 레인 스탤리, 크리스 코넬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펄 잼은 현역이며 현재 진행형이다. 대중에게 그런지의 시그니처 사운드를 명문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으며 푸 파이터즈, 니켈백, 크리드, 매치박스 트웬티로 대표되는 포스트 그런지에 가장 많은 유전자를 남겼다는 점에서 가산점을 주고 싶다.
「Aja」라는 제목은 도널드 페이건의 고교 동창의 남동생의 한국인 아내 이름 ‘애자’에서 따왔다. 스틸리 댄은 도널드 페이건과 월터 베커의 재즈 록 듀오로 스튜디오 미학의 최고봉으로 불린다. 연주음 하나하나에 장인정신으로 정교한 세공이 들어간 명품을 줄줄이 생산했다.
이들은 1970년대의 가장 지적이고 복잡한 대중음악을 만들었다.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인내심을 잃은 심경을 비밥 재즈로 표현한 ‘Black Cow’나 동양철학적인 형이상학을 오선지에 옮긴 “Aja”이 진지하게 앨범의 무게를 지탱한다.
반면에 차트에서 히트한 “Deacon Blues”은 부드러운 음악과 건조한 유머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파티 송인 “Peg” 데라소울의 ‘Eye Know’에 샘플 되었을 만큼 대중적이다. “Josie”은 빠른 템포의 비밥 재즈, 상큼한 선율, 복잡한 편곡, 어두운 단조, 두터운 보컬 하모니로 고급스럽지만 난해하지 않은 중간 맛으로 유혹한다.
거리두기를 잘했다고 할까? 밀고 당기기의 달인이었다. ‘대중적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지적인 유희를 제공한다. 중의적인 가사는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고, 세련되었지만 은밀한 곡조와 사운드는 듣는 이를 조심스럽게 격리시킨다. 이것이 「Aja」이 특별해진 비결이다.
영국 인디음악의 상징, 조니 마의 독특한 징글 쟁글(jingle jangle) 기타 사운드와 모리세이의 씁쓸한 서정적인 재치로 영국식 기타 팝의 형식미를 완결 짓는다. 매드체스터(Madchester)를 경유하여 블러, 펄프, 오아시스, 스웨이드에 의해 브릿 팝으로 발전한다.
'퀸(Queen)'라는 명사에 가려놓았지만, 그가 노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대상은 영국 사회이다. "The Boy With the Thorn in His Side"나 "Bigmouth Striks Again", “There Is A Light That Never Goes Out’은 정확하게 대처리즘(대처주의)으로 발생한 대량실업과 빈부격차로 말미암아 경제 불황과 인플레이션의 위협에 젊은이들은 불안과 소외감을 달래고 또 달랜다. 모리세이의 건조한 위트는 그가 겨냥하는 모든 대상의 정곡을 찌르고, 자기 연민까지 완벽하게 표현한다.
‘그런지의 대부’라 불리는 캐나다의 전설적인 싱어송라이터 닐 영은 대중음악사에서 밥 딜런에 비견될 작가다. 컨트리, 포크, 일렉트로닉, 록을 넘나드는 그의 음악은 예측불허이지만 매우 자연스러운 역설로 가득하다. 「After The Gold Rush」이 바로 그러하다.
사랑의 상실을 섬세하게 그린 “Only Love Can Break Your Heart “와 투박한 포크 “Cripple Creek Ferry”에서 닐 영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굉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Tell Me Why’나 ‘Only Love Can Break Your Heart’, 그리고 ‘Don’t Let It Bring You Down’ 같은 곡은 희망을 잃어버린 낭만주의자라는 평을 얻었다. 하드록 “Southern Man”이 남부지방 사람을 비하했다 하여 레너드 스키너드(Lynyrd Skinyrd)로부터 'Sweet Home Alabama'라는 반격을 받긴 하지만 말이다. 「After The Gold Rush」은 2년 뒤에 발매되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컨트리 록 앨범으로 기록되는 「Harvest」의 밑그림이 되었다.
한때 척 D를 “거리의 CNN"이라 불렀지만, 퀸스브릿지 출신 어떤 MC가 『소스』 매거진에서 보기 드문 ‘클래식’ 등급을 받으면서 스트리트 랩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거리의 언어들은 힙합의 역사에 없었을지 모른다. 게토에서 성장하고 자라 늘 지켜봐 온 하류인생들의 초상을 그대로 읊는다. 이 음반을 기점으로 랩은 딱딱한 문어체에서 신랄한 구어체로 탈바꿈한다. 거리의 선지자가 된 힙합의 시인이 생애와 음악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한다.
강렬한 라임만으로「Illmatic」은 힙합 명예의 전당에 오를만하다. 하지만 훌륭한 프로듀스는 이 앨범을 어반 뮤직의 명반에 올려놓는다. DJ 프리미어, Large Professor 피트 락, Q-팁, Les의 공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이 디비전과 프로듀서 마틴 하넷의 혁명적인 디지털 이펙트를 담은 1집「Unknown Pleasures」로 포스트 펑크가 앞으로 가야할 길을 예지했다면 2집은 그 끔찍한 예언이 실현되고 말았다. 끝을 의미하는 제목처럼 이언 커티스의 죽음 그리고 남은 세 맴버가 스스로에게 고하는 종언이었다.
「Closer」는 밴드가 갖고 있는 미니멀한 음울함을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한다. 버나드 서머의 신시사이저가 배경으로 깔리는 와중에 ‘Heart And Soul’은 독특한 박자의 기타리프가 리듬파트와의 비대칭성을 강조하며 긴장감을 유지한다. 이안 커티스의 개인적 고통을 온전히 담은 심리스릴러 ‘Twenty Four Hours’은 그의 불안과 초조, 위태로운 심상이 담겨있다. ‘The Eternal’은 단조 풍의 피아노 연주와 스산한 음향 효과로 이 우울한 앨범을 유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들의 강렬하고 어두운 음악은 더 큐어, U2, 사운드가든, 라디오헤드, The xx, 래퍼 대니 브라운 등에게 유령처럼 드리워져 있다. 남은 세 명은 ‘뉴 오더’라는 신스팝의 전설로 여전히 활동 중이다.
척 베리가 사실상 '로큰롤(Rock & Roll)'을 발명했다. 비틀스의 존 레넌은 "만약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면 ‘척 베리’라고 바꿔야 한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모든 기타리스트와 록 음악가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흑인으로 최초로 백인 음악을 연주한 선구자로 ‘R&B와 컨트리의 조합‘을 통해 인종통합을 행한다.
1955년부터 1965년까지 발표한 "Maybellene", "Roll Over Beethoven", “School Day (Ring! Ring! Goes The Bell)", "Sweet Little Sixteen", "Rock And Roll Music"로 대표되는 마법들이 68분 동안 환호의 도가니로 몰고 간다.
「Aquemini」는 힙합의 창의성을 극한으로 올린다. 앙드레 3000과 빅 보이는 플로우, 가사, 프로덕션을 통해 이 장르의 뿌리에 충실하면서도 그 흐름을 남부 힙합으로 가져왔다. 아웃캐스트의 유산은 앞으로 힙합 아티스트라면 누구라도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켄드릭 라마가 <To Pimp A Butterfly>이다.
"West Savannah", "Da Art Of Storytelling" (Part 1, 2)“, "Spotti Helpedious"로 대표되는 음반의 특징은 풍부한 텍스트가 가져온 내러티브, 두 MC의 톡톡 튀는 상상력, 랩과 노래를 병행하며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멜로디를 쏟아낸다는 점이다. 70년대 휭크(Funk)와 소울을 깊이 탐구하며 개성 있는 사운드를 뽑아낸다. 실제 연주를 입히면 힙합 음악이 얼마나 입체적일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정리하자면 「Aquemini」은 선배 래퍼들이 구축한 모든 컨벤션을 거부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담겨있다. 트랩과 싱잉 랩, 더티 사우스가 걸어가야 할 인프라를 구축했다. 랩과 록의 교체기에 벌어진 이러한 변화는 릴 웨인, 칸예 웨스트, 드레이크, 퓨처, 빈지노, 창모, 지코 등 새 시대의 래퍼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했다.
기타리스트 로버트 프립은 록을 클래식의 반열에 올리려고 도전한다. 클래시컬 록(Classical Rock)이라 불리는 사조를 쌓기 위해 그렉 레이크(베이스), 마이크 가일즈(드럼), 이언 맥도널드(키보드), 피트 신필드(신서사이저)와 데뷔 음반을 준비한다. “킹 크림슨은 한 번도 홍보를 한 적이 없다. 순전히 입소문을 타고 천연두처럼 퍼져나갔다.”라는 그렉의 말마따나 음반은 조용히 팔려갔다.
칸예 웨스트가 “POWER”에서 샘플링한 ‘최초의 얼터너티브’ 격인 ‘21st Century Schizoid Man’은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노래한다. 아름답고 차분한 발라드 ‘Epitaph’나 음산한 전원시 Moonchild’ 역시 진보된 사운드를 들려준다. 클래식과 록의 절충이라는 단순한 접근을 초월한 명암, 고저, 문학성, 깊이가 풍성하다.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은 실험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프로그레시브 시대’를 개막한다.
레게의 포교자인 밥 말리는 단순한 뮤지션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레게의 진정한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 애썼다. 그는 심오한 철학가이면서 단호한 행동주의자로 현실정치에 몸담았다. 서구 제국주의의 압제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독립을 쟁취한 조국 자메이카를 축하고 기념한다. 마치 음표에다 '자신들의 과거 역사와 문화, 기원을 모르는 사람은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다'라는 명언을 새겨 넣은 것 같다.
에릭 크랩톤이 “I Shot The Sheriff”을 커버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하자 대중들은 밥 말리에 대한 관심은 한층 더 높아졌으며 뮤지션들 사이에서 레게는 당시 대중음악에 새로운 방법론으로 각광받았다. 그로 인해 전 세계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은 2박과 4박이면서 박자의 강세가 뒷부분에 있는 독특한 레게 리듬을 앞 다투어 자신들의 음악에 이식하기 시작했다.
‘No Woman No Cry'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자메이카 사람들의 한(恨)을 승화시킨 명곡이다. 'One love/People Get Ready'는 폴리 리듬을 멜로디로 만드는 능력을 뽐내고 라스타파리아니즘을 믿는 모든 흑인들이 아프리카로 돌아가기 위해 지금 있는 곳에서 탈출하라는 'Exodus'는 그의 영성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닥터 드레는 국내에 헤드폰 만드는 사람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80년대 슈퍼그룹 N.W.A. 의 음악적 핵심이었다. 「The Chronic」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힙합 프로덕션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초창기 랩의 브레이크 비트이건 작금의 트랩, 그라임, 드릴이건 간에 제임스 브라운이 창시한 휭크(Funk)의 자손들이다. 그래서 드레는 ‘팔리아먼트/펑카델릭’의 리더 조지 클린턴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낸다.
명민한 젊은 MC들과 대동하고 랩의 잔혹성을 느긋한 스타일의 70년대 소울로 대체함으로써 ‘G–훵크’라는 힙합 프로듀싱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갱스터 랩에 대한 부드러운 접근은 당시의 지배적인 사운드로부터 벗어나 감미로운 바운드를 예고했다. <Nuthin' But A G Thang>와 <Let Me Ride>로 대표되는 소위 「웨스트 코스트 사운드」를 완성한다.
많은 밴드들이 내분으로 인해 해체되지만, 그중에서 플리트우드 맥은 대표적인 예시중 하나다. 밴드 커플 크리스틴 맥비와 존 맥비는 이혼했고, 린지 버킹엄과 스티비 닉스는 헤어졌다.
녹음실에서 서로 말없이 각자 따로 곡을 썼다. 가장 가슴 아픈 사연은 크리스틴이 밴드의 조명 디자이너와의 불륜을 다룬 "You Make Loving Fun"을 썼을 때의 일이다. 그녀는 전 남편에게 베이스 연주를 하게 했다. 이런 상호 파괴적인 분위기 속에서 "Go Your Own Way"와 "The Chain"이 가슴 저리게 파고든다. 어쩜 이별의 상흔이 진솔한 호소력을 갖춘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소울의 대부(Godfather Of Soul)는 자타공인 '역사상 가장 많이 샘플링된 아티스트'이라는 기록은 그만큼 영향력이 컸다는 의미다. 1962년 10월 24일, 제임스 브라운은 그의 음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비 5천7백 달러를 들여 아폴로 극장에서 공연 실황을 녹음했다. 브라운과 음악감독 루이스 햄린은 완벽함과 철저한 정확성을 요구하며 밴드를 훈련했고, 녹음 엔지니어 톰 놀라는 대혼란을 포착했다. 브라운은 정열적인 무대매너로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관객은 이에 열렬한 환호로 답했다.
빌보드 차트 2위까지 오른 「Live At The Apollo」은 66주간 차트에 머물렀다. 이 음반은 R&B의 하위 장르인 'Funk'의 도래를 세상에 알렸고, 음악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 뜨거운 열기는 온전히 힙합과 디스코, 뉴 잭 스윙, 컨템퍼러리 재즈, 드럼 앤 베이스에게 전이되었다.
단언컨대 트립 합의 절정은 포티스헤드의 「Dummy」이 분명하지만, ‘힙합에 대한 영국의 답변‘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연대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거릿 대처 수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영국의 빈부격차가 극심해진다. 노예무역이 성행했던 항구도시 브리스톨 슬럼가에서 ‘더 와일드 번치’라는 DJ집단의 사운드 시스템이 형성된다. 자메이카계 영국인들이 선조의 문물 레게, 덥, 힙합, 소울이 융합해 이른바 ‘브리스톨 사운드’가 탄생한다.
이 3인조는 새로운 형태의 '일렉트로니카(electronica)'를 정의했다. 「Blue Lines」은 꿈도 희망도 없는 갱문화의 산물이다. 프로듀서인 ‘더 와일드 번치’부터가 갱 출신이 속해있는 집단이다. 음습하지만 도회적인 세련된 엔지니어링, 곱지 않은 울퉁불퉁한 전자 비트 틈바구니에서 귓가에 착착 감기는 우울한 멜로디가 위험하리만치 치명적이다. 「Blue Lines」은 역사상 최고의 다운템포 앨범 자리를 놓고 다툴만한 왕위 계승자로 만들었다.
비틀스 명반의 최고작을 고르기가 거의 불가능하듯이 레드 제플린 앨범 중 한 장을 선택하는 것은 어렵다. 2집 「Led Zeppelin Ⅱ (1969)」은 헤비메탈의 출현을 알린 보물선이며, 5집 「Houses Of The Holy (1973)」은 레게, 휭크, 스윙, 두왑 등 블루스를 초월한 록의 영역을 넓혔다. 6집 「Physical Graffiti (1975)」은 그들이 해낼 수 있는 록의 모든 장르를 절정의 기량으로 자기 언어로 번안한다.
아마 23세기쯤 우리가 알고 있는 대중음악을 초월한 무언가로 진화했을 때조차 ‘앨범 록’의 대표주자로 제목이 붙지 않은 4집 「Untitled(Led Zeppelin IV)」을 청취할 것이다. 레드 제플린은 모든 록 밴드가 꿈꾸는 이상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앙상블을 펼친다. ‘하드록, 사이키델릭, 아트록, 포크, 월드뮤직’의 하이브리드 정석을 들려준다. 그렇게 그들의 모범적인 음악은 70년대 록을 정의한다.
롱아일랜드 딕스 힐스에 있는 존 콜트레인의 집(위층 침실)에서 1달간 틀어박혔다. 아내 앨리스에 의하면 그가 나중에 「A Love Supreme」라 부를 악보를 들고 거실로 내려오는 순간 마치 ’ 모세가 산을 내려오는 순간 같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피아니스트 맥코이 타이너 , 베이시스트 지미 개리슨, 드러머 엘빈 존스와 한 큐에 녹을 끝마쳤다.
4악장 acknowledgement(승인) / resolution (결의) / pursuance(추구) / psalm(찬미)로 구성된 음반은 아들을 허락하신 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아들이 태어나자 흑인 차별이 만연한 현실에 대한 도피로써 종교적 귀의를 고해한다.
당시까진 클래식에서나 목격됐던 뚜렷한 주제의식(콘셉트)에 의거한 최초의 모던 재즈 앨범을 추구했다. 인도/아랍의 스케일을 연상시키는 모달 재즈를 발전시키면서 가스펠, 소울, 사이키델릭, 하드 밥까지 굉장한 응집력으로 한데 모은다.
결코 듣기 편한 음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영적인 기운에 의해서인지 앨범은 스테디셀러로 불티나게 팔려갔다. 색소포니스트 조슈아 레드먼, 퓨전 재즈의 거장 존 맥러플린, 라틴 록의 지존 산타나, U2, 더 버드 같은 록 밴드까지 폭넓은 유산을 남겼다.
사회 불안으로 점철된 10년, 회색의 1970년대에 영국은 노동당 정부의 정책 실패로 실업률이 20%까지 치솟고 IMF 구제금융으로 무너지고 있었다. 이때,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반란가 ‘Anarchy In The UK’와 영국병에 대한 거대한 분노를 담은 ‘God Save The Queen’가 기득권을 겨냥한 성난 민심을 대변했다.
섹스 피스톨스(이하 섹피)는 뉴욕 펑크 밴드 ‘라몬스’가 완성한 음악 스타일과 애티튜드를 추종했다. 군더더기 없는 파워풀한 쓰리 코드, 질주하는 거친 사운드, 직설적인 쉽고 구체적인 가사, 허세와 가식 없는 솔직한 자세 등을 빠르게 흡수했다. 공포영화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악명을 몰고 다녔다. 특히 제이미 레이드가 작업한 커버에 담긴 욕설 때문에 음반 소매상은 판매를 거부했고, 민사소송이 제기된 지역도 있었다. 버진 레코드의 설립자 리처드 브랜슨이 언어학 교수를 법정에 불러 이 단어의 어근이 전혀 외설적인 것이 아니라고 규명한 뒤에야 기각되었다.
섹피는 '펑크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과격한 정치적 급진성, 파격적인 아트워크와 연단 사고, 수많은 악성루머가 밴드의 악명을 부풀렸다. 스타일이 너무 과격해서 앨범이 담고 있는 내용이 소홀할 것 같지만 베이시스트 글렌 매틀록이 주도한 앨범은 제법 탄탄하다. 일자리를 잃은 젊은이들의 울분과 상실, 분노를 로튼은 “당신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특권계층을 향해 퍼부었다. 이 목소리는 음악, 패션, 세대의 태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크게 바꿔놓았다.
신중현은 당시 유행하던 '록'이라는 세계적인 문화교류에 한국 문화를 알릴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감 있게 빚은 우리 정서 기반의 양악 ;한국적인 록'을 주장한다. "미인"의 대히트로 앨범의 인기도 1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런데 박정희 찬양가를 만들라는 요구를 거절하자 신중현의 작품들이 줄줄이 금지곡이 되었다.
그는 음악인생 60주년을 맞은 자리에서 "이 음반으로 한국적인 흥이나 정서를 싶은 취지였어요."다고 당당하게 한류 이전의 한류를 창안했었다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 양악과 우리 가락이 하나의 소리로 합쳐지는 과정은 마치 'K-POP'의 창세기를 펼쳐보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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