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는 “한국 영화를 세상에 알린 남자(The Man Who Put Korean Cinema on the Map)”라고 소개하고 있다. 코리안 뉴 웨이브 5인방 중에서 가장 작가주의적이며 극단적으로 과장된 감정과 냉정한 표현의 결합, 블랙코미디와 아이러니, 표현주의적인 화면 구성, 금기의 위반, 잔혹한 폭력 묘사 등을 특징으로 인간의 본성과 죄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후기로 갈수록 여성의 해방을 주제로 삼지만, 염세주의적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 묘사가 노골적이라 호불호가 갈린다. 그의 초라한 시작부터 야심찬 이후의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영화의 순위를 매겨보자!
#11 : 달은… 해가 꾸는 꿈 (The Moon Is … The Sun's Dream, 1992)
그의 데뷔작은 대부분의 비평가들 심지어 감독 본인도 부끄러워한다. 이 영화는 홍콩 누아르를 지향하고 있으나 음산하고 혼란스러운 줄거리, 지나치게 멋을 부린 대사, 덜 익은 캐릭터는 용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죄의식을 탐구하는 박찬욱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있는 주제의식은 여기서도 흥미롭게 드러나 있다.
#10 :삼인조 (TRIO, 1997)
<삼인조>는 박찬욱이 좋아하는 스즈키 세이준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 그의 개성이 처음 발휘된 작품으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뒤 자살을 결심하는 색소폰 연주자 안 씨(이경영), 은행강도로 한탕 하려는 폭력배 문 씨(김민종), 아이를 찾는 수녀 지망생 마리아(정선경)이 얽히고설킨 로드무비로 후반으로 갈수록 멜로드라마로 탈바꿈한다. 대중성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기획 단계의 난폭함을 순화하는 과정에서 완성도가 어정쩡해졌다.
#9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I'm A Cyborg, But That's Ok, 2006)
이 기발한 로맨틱 코미디는 박찬욱의 다른 영화들처럼 어둡지 않다. 세트 디자인, 심미적 구현, 극의 분위기, 초현실주의적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기존의 박찬욱과는 덜 노골적이다.
박찬욱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소꿉놀이에 비유하며 정신병원을 일종의 커다란 유치원에 비유하고 있다. 소꿉놀이는 어른들의 역할을 흉내 내며 사회적 관계를 배우는 일종의 예행연습이다. 환자들의 망상마다 개별적인 세계관을 부여하며 두 남녀가 서로를 공감하고 관객들이 동정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8 : 스토커 (Stoker, 2013)
할리우드 진출작은 다소 아쉬운 극본에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원숙함을 뽐낸다. 18살 인디아의 성장통을 스크린에 화려하게 옮긴다. 아늑한 집을 낯설고 위험한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정정훈의 촬영, 10대 소녀의 감정 기복을 표현한 클린트 만셀의 음악, 근친상간을 암시하는 필립 글래스의 관능적인 피아노곡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소녀의 정서를 빼닮았다.
#7 : 친절한 금자씨 (Lady Vengeance, 2005)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은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에 대한 답가를 들려준다. 영화는 이금자의 행동·동기·기분에 따라 영화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데 그것은 보이는 방식, 느끼는 방식, 그리고 영화의 심리 상태를 포함한다.
(<올드보이>, <복수의 나의 것>와는 결이 다른) 희망적인 결말, 판타지적인 몽환, 블랙 유머가 복수 3부작에 반복적인 폭력의 모티브와 금기에 대한 위배와 어울려 복수의 이면을 드러낸다.
#6 : 아가씨 (The Handmaiden, 2016)
칸 영화제 벌칸상
요즘 에로틱 스릴러는 금지된 열매로 금기시하고 있다. 그런데 박찬욱은 제목 ‘아가씨’의 어원에 숨겨진 함의와 정치적 올바름으로 점차 영화시장에서 기피되는 에로틱 스릴러를 통해 역설적으로 박찬욱은 성별, 젠더, 성적 지향성으로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1860년대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세라 워터스의 쿼어소설<핑거스미스>를 1930년대 일제강점기로 옮겨와서 ‘라쇼몽 효과’를 차용한다. 1부는 숙희를 중심으로, 2부는 히데코를 중심으로 하다가 3부는 2부 이후의 후일담을 다룬다. 두 여성의 복수는 전에 없는 짜릿함과 해방감을 안겨주었고 대담하고 관능적인 이미지에선 정치적 올바름의 족쇄를 푼다.
#5 :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 2000)
박찬욱의 첫 번째 비평적 성공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튄다. 남북 장병들 간의 이뤄질 수 없는 우정을 통해 분단의 비극을 표출하고 있다. 최인훈의 <광장>처럼 냉전 체재로 적대적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남북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는 박찬욱 영화 중 가장 인간적인 작품이며, 그의 비범한 작품 중에 가장 대중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이다.
#4 : 복수는 나의 것 (Sympathy For Mr. Vengeance, 2002)
신명기 32장 35절을 인용한 제목처럼 복수는 동그라미처럼 순환한다. 상대가 착한 줄 알면서도, 복수의 칼을 들어야 하는 동진(송강호)과 벙어리여서 제대로 고함 한번 지르지 못한 채 죽어가는 류(신하균)의 대비는 무슨 뜻할까? 동진에게는 류와 영미(배두나)가, 류에게는 자신의 장기를 떼어간 사기단이 복수의 대상이다.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는 무엇일까? 불평등한 계급 사회에서 결국 누구나 피해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다.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비극은 3부작 중 가장 여과 없이 잔혹함을 보여준다.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무미건조한 연출, 하드보일드한 주제의식은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참신함으로 가득하다.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천국과 지옥》가 떠오른다.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우리가 이런 상실감을 시달릴 때 인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악의 본능이 튀어나오기 십상이다. 이것은 어느 문화권, 여러 시대에 걸쳐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그 보편성이 이 작품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게 한다.
#3 : 헤어질 결심 (Decision To Leave, 2022)
칸 영화제 감독상
박찬욱을 상징하던 과장된 감정, 아이러니, 블랙코미디, 표현주의적인 화면 구성, 금기의 위반, 폭력적인 묘사, 죄의식과 인간 본성의 탐구 등을 모두 버렸다. 급기야 남녀 간의 로맨스를 이야기하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숨긴다.
배우의 연기와 카메라 샷, 편집 등 영화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요소로 깊은 감흥을 끌어내고 싶다는 감독의 말처럼 사람이 관계를 맺을 때 느끼는 감정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을 영화에 담았다. 그 디테일한 인물 묘사가 수많은 여백을 갈음한다.
#2 : 올드보이 (Old Boy, 2003)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올드보이>는 오대수가 감금당한 이유보다 15년 만에 풀어준 까닭이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스크린에 옮기며 영화 내적·외적 모순과 도덕적 결함을 다룬다. 박찬욱 특유의 영화언어는 복수, 죄책감, 회개에 인류가 주목하는 연유를 신화적으로 풀이한다.
#1 : 박쥐 (Thirst, 2009)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
박찬욱은 인터뷰를 통해 그동안 찍었던 작품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박쥐》였다고 밝혔다. 왜냐면 자기 맘대로 다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만큼 박찬욱 본인의 스타일, 작가주의, 영화 철학을 십분 발휘하고 있다.
감독은 AV Club 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화에 대해 "사람이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했다. <박쥐>의 핵심 미학은 ‘혼종’이다. 범죄물, 종교영화, 뱀파이어, 추한 것과 아름다운 것, 진지함과 경박함, 눈물과 웃음, 성(聖)과 속(俗), 현실과 환상, 희생과 욕망, 일상의 비루함과 신비 등 온갖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 현상현은 신부이자 흡혈귀로 살아가야 하는 탓에 피를 갈망하되 살인은 하지 않는다는 역설에 빠져있다.
상현과 태주의 사랑 또한 모순적이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관계가 붕괴로 향해간다. 이처럼 <박쥐>는 모순되고 역설적인 요소들을 시종일관 충돌시킴으로써 욕망의 질주가 파국을 몰고 오는 아이러니를 표현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일지 모르며,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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