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윤 감독이 즐겨 쓰는 구도[줄거리] 계란 노른자 같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계란 흰자 같은 경기도 남쪽 끝 산포마을에서는 염미정(김지원)네 가족이 산다. 씽크대 공장을 운영하는 아버지 염제호(천호진)는 여동생 빚보증을 잘못 서 삶이 팍팍하다. 언니 기정(이엘), 오빠 창희(이민기), 미정 3남매는 왕복 서너 시간의 서울로 출퇴근하며 왜 사는지도 모른 채 꾸역꾸역 버텨낸다. 어느 날 신원불상의 ‘구씨(손석구)’는 전철을 잘못 내려 산포 마을에 닿았다. 엎어진 김에 미정네 앞집에서 염제호의 공장일을 도우며 한솥밥을 먹게 된다.
1. 추앙은 '안식'이다
"술 말고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조금 있으면 겨울이에요. 겨울이 오면 살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렇게 앉아서 보고 있을 것도 없어요. 공장에 일도 없고, 낮부터 마시면서 쓰레기 같은 기분 견디는 거, 지옥 같을 거예요. 당신은 어떤 일이든 해야 돼요.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 구씨를 향한 미정의 고백
염미정은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한집에서 식사하는 것이 불편했다. 전 남친에게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했고, 회사 상사와 거짓 불륜 스캔들에 휘말리던 그녀로서는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다. 한편으로 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하루하루 술로 버티는 구씨의 모습에서 행복하지 않은 삶을 반복하는 자신을 닮은 교집합을 발견한다. 그녀는 대뜸 “날 추앙해요”라고 구씨에게 고백한다. 행복하면 더 큰 불행이 올까 두려워했던 구씨도 그녀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새로운 사람이 되고 싶었던 두 감정은 충돌사고를 일으킨다. 서로에 대한 추앙은 결국 안도와 위로를 각자에게 제공한다. 사람에 지친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휴식과 재충전을 취한다. 청춘에게 지금 존경과 존중이 필요하다. 계약직도 사람이고, 알바도 사람이고 백수도 사람이라고 추앙 신드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염창희는 “솔직히 어디에도 깃발 꽂을만한 데를 발견하지 못했다. 돈, 여자, 집, 차. 다들 그런 거에 깃발 꽂고 달리니까 덩달아 달린 것뿐. 욕망도 없었으면서 그냥 같이 달렸다.”라는 독백에서 알 수 있듯이 N포세대의 절망을 토로한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어도 상대를 받아들일 (경제적)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단념한다. 꿈마저 꿀 수 없는 현실에 좌절된 그는 그저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하루를 살 뿐이다. 그러다 우연히 들어선 곳에서 자신의 진로를 발견한다.
첫째 염기정은 빠르게 사랑에 빠지지만, 진짜 사랑을 해본 적 없었다. “아무나 사랑”하겠다고했지만 소개팅 상대가 싱글대디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험담을 늘어놓다가 그 옆자리에서 딸의 생일을 축하하는 조태훈(이기우)에게 미안해졌다. 그가 동생의 회사 동료에 고등학교 동창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민망해졌고,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게다가 조태훈의 등짝과 친절한 웃음에 그만 “저는 관심이 가는 순간, 바로 사랑이 돼요. 단계라는 게 없어요. 처음부터 바로 그냥 막 많이 좋아요”라며 그에게 돌진한다. ‘금싸바’답게 사랑으로 해방을 꿈꾼다. 다만 조태훈의 둘째 누나와 딸에게서 인정받지 못한 인정욕구에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지만 일주일에 3-4번 자신이 좋아하는 계란빵을 건네주는 사람이 곁에 생겼다.
2.<우리들의 블루스>와 곁이 같은 일상드라마
천호진, 이엘, 손석구, 이민기의 연기가 좋았다.<나의 해방일지>는 매회 주인공이 풀어야 할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삶 속에서 느끼는 고민을 담았다. <나의 해방일지>는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기가 너무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제 인식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대사들은 하나같이 형이상학적이다. 즉, 대사만 놓고 보면 현실성이 없다. ‘추앙’, ‘환대’ 등 문어체 표현들이 소설책을 대신 읽어주는 ASMR처럼 가슴에 꽂힌다.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특이하고 생경하다. 스토리는 군데군데 비어있다.
<나의 해방일지>는 대한민국 청춘들이 품고 있는 연애, 취업, 독립 등 고민들을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멀찍이 떨어진 이유는 가까이하기엔 현실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의 해방일지>는 실존주의에 주제로 한 심리 드라마다. 스스로 일어서기 힘든 게 요즘 청춘 세대의 실태이다. ‘추앙 신드롬’에는 어른으로 당당하게 서고 싶은 ‘자존(自存)’을 다루고 있다.
추앙의 눈빛대한민국 드라마에서 IMF 이후 ‘서민 드라마’가 사라졌었다. 서민들이 올라간 사다리는 걷어차였는데도 버젓이 ‘부자되세요’라는 공익광고가 울려 퍼진다. 그 괴리에서 판타지에 가까운 근사함과 화려함을 동경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생은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극중 삼 남매는 열심히 살고 싶지만, 무언가 모자란 것 같은 보통 사람의 피곤함이 느껴진다. 대한민국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이유는 없지만, 행복하기 어렵다.
박해영 작가는 1인칭 시점에서 시청자와의 심적 거리를 좁힌다. 실존에 대한 깊은 고찰, 개인의 자존을 다뤄서 좋았다. 허투루 쓴 대사가 없을 만큼 대사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노골적으로 전달한다. 그리고 군상극을 표방하면서 다룰 이야기의 크기가 커졌음에도 생략이 잦아 사건 진행이 허술하다. 극본은 16부작보다 10부작으로 줄였다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김석윤 감독은 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하드코어 헨리>의 1인칭 POV, 촬영감독 크리스토퍼 도일을 참고하며 몇몇 시퀀스를 영화적으로 구성했다. 개인적으로 왕가위나 제임스 건처럼 올드팝을 썼다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느린 호흡에 뮤직비디오에 가까운 여백, 단조로운 발라드 위주의 OST 등은 한드의 고질적인 한계인 점을 생각하면 꽤 영리한 대처이다. 다만 장비와 촬영 여건의 한계가 느껴져서 안타깝다. 그는 최선을 다했기에 크게 탓하지 않고 싶다.
사랑도 인생도, 업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나의 해방일지>에 나오는 해방은 누구나 한때, 한 번쯤 고민했을 이야기다. 마음 한편을 옮겨 놓은 대사들에 (시청자의) 마음을 내놓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해방일 것이다. 절실히 위로가 필요한 시대다.
★★★ (3.3/5.0)
Good : 청춘의 자존을 다루다.
Caution : 박해영 작가의 직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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