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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시스트:믿는 자*원작의 트레이싱

《The Exorcist: Believer·2023》

by TERU

①호러 명가를 재건해 온 데이빗 고든 그린 감독


데이빗 고든 그린과 블룸하우스, 유니버설이 〈할로윈〉 3부작으로 고전 공포 프랜차이즈를 되살렸듯이 이번엔 〈엑소시스트〉 리부트 3부작을 기획했다. 데이빗 고든 그린은 '로리 스트로드와 마이클 마이어스의 재대결'이라는 〈할로윈 H20〉의 아이디어를 재활용한 〈할로윈 2018〉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창의성이 부재한 후속작〈할로윈 킬즈〉, 〈할로윈 엔드〉으로 ‘반쪽짜리 리부트’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럼 데이빗 고든 그린은 〈엑소시스트〉를 어떻게 되살릴지 지금부터 살펴보자!



②〈엑소시스트〉이 고전이 된 까닭은?

1편의 크리스 맥닐(엘린 버스틴)과 리건 맥닐(린다 블레어)

공포영화는 위배의 장르다. 공포영화가 불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심리적 마지노선을 넘기 위함이다. 특히 그 불쾌함이 사회적·도덕적 금기를 건드릴 때 두려움은 더 극대화된다. 우리가 ‘정상’이라고 믿고 있던 이데올로기가 무너져낼 때 우리는 영화를 불안정한 텍스트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한 자극이 선을 넘어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위반(이탈)이 동반된다. 뇌 과학에 따르면 불쾌와 쾌락, 불안과 안전을 관장하는 뇌 영역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가 공포영화를 시청하는 이유일 것으로 추측된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엑소시스트〉는 ‘악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영화적으로 체험시킨다. 캐릭터마다 고충을 갖고 있어 악마의 위협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온다. 주인공들의 사연을 다음과 같다. 싱글맘인 크리스 맥닐은 딸의 불치병이 자신 때문에 어긋난 것이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한다. 한편, 메릴 신부는 비극적인 경험 이후 신앙을 잃어가는 영적 갈등에 시달린다. 카라스 신부는 가난 때문에 어머니를 돕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또한 리건의 스파이더 워크 같은 충격적인 장면은 나약한 소녀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 모으는 한편,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독교에 정면을 도전한 것이기도 하다.


또 가톨릭이 금기시하는 ‘자살’ 그것도 성직자가 행한다는 것에서 앞서 말한 위배감은 드라마틱하다. 윌리엄 프리드킨은 순교의 이미지로 인식되도록 캐릭터들의 고민을 점층적으로 상승되어 가며 관객을 자극한다. 가톨릭에 성인이 행하는 순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성립하지 않는다. 주류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다 희생당하는 것이기에 가톨릭 교리에서 자살로 보지 않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관람 후 카라스 신부의 희생을 악에 대한 선의 승리로 해석하셨다.


윌리엄 프리드킨은 악마에 대해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영화는 신의 존재는 몰라도 악의 위협만을 확실히 각인시킨다. 초자연적인 위협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무섭다. 여기에 더해, 인간적인 딜레마들 앞서 말했던 싱글맘의 송구스러움, 신부의 배교, 성직자의 자기희생은 단순한 선악 대결을 신학적인 악의 존재로 논의하도록 돕는다. 물론 프리드킨은 아무런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오로지 관객의 몫으로 남겨뒀다.



③ 원작을 트레이싱한 〈… 믿는 자〉

1편의 이스터에그

구마(빙의) 된 소녀를 2명으로 늘렸다. 빙의된 아이의 부모 중에 앤젤라의 아버지 ‘빅터 필딩(레슬리 오덤 주니어)’이 돋보인다. 1973년 원작이 크리스 맥닐의 ‘모성애’라면 이번 리부트는 빅터의 '부성애'로 성전환된 셈이다. 빅터는 메릴 신부와 똑같이 과거의 경험으로 신앙을 저버린 배교자로 등장한다.


원작의 크리스 맥닐(엘린 버스틴)이 50년 만에 프랜차이즈에 복귀했지만 버스틴의 참여는 대부분 의례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깊이 관여하지 않는다. 그녀의 역할은 메린 신부의 행적에 기초한 답습에 가깝다.


크리스 맥닐과 빅터 필링

구마(驅魔) 소재의 영화를 몇 편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진행과 장면을 답습한다. 더욱이 정치적·신학적으로 무난한 선택을 하다 보니 결말마저 심심해졌다. 이렇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향후 나올 속편들에 대한 포석을 미리 깔아 두는 것이다. 스포일러 없이 이것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니 이번 리뷰에서는 생략하겠다.


둘째 배교(背敎)의 영적 갈등이 단편적이다. 배교란 악마가 준동하고 신이 부재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신앙을 저버리는 행위로 이해하면 좋다. 원래 정의는 더 큰 함의를 갖고 있지만 영화상으로는 그 정도 범위에서 작동한다. 어쨌든 원작의 주제였던 '배교(背敎)'를 잇기 위해 영화는 프리드킨의 연출법을 따라가는데, 종종 〈컨저링〉, 〈인시디어스〉류의 영화가 사용하던 기법을 섞는다. 고전적인 화법에 충실하다가 갑자기 현대적인 점프 스케어나 충격적이고 공격적인 사운드 편집이 튀어나오니 어색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부조화는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없고, 악의 존재로 고통받는 캐릭터들의 서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것을 방해한다.


데이빗 고든 그린은 〈엑소시스트 II 〉가 실패한 경로를 답습한다. 신학에서 주요 논쟁거리가 되는 ‘악의 문제’를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믿는 자〉는 악령에 빙의된 것으로 묘사되는 소녀들은 기존의 규범을 흔들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안전지향주의 때문이다. 속편을 위해 아이디어를 남겨놓은 것이겠지만, 존 부어만이 연출한 2편은 적어도 무언가를 시도했다. 엑소시스트답지 않았다거나 공포스럽지 않았다는 비판에도 존 부어만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 2편은 역사상 최악의 속편이라는 악명 속에도 존 부어만이 파헤친 악마의 정체(파주주)는 이후 프랜차이즈에 계속 등장하게 되었다.


〈…믿는 자〉는 가톨릭 이외에 다른 종교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신학적·인문학적 입장은 명확하지 않아 답답하다. 그래서인지 성직자 캐릭터들에 큰 역할을 맡기지 않았다. 속편을 봐야 제대로 알겠지만, 이것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신과 악마 둘 다 인정하지 않겠다면 ‘불가지론’으로 이해하겠지만, 기독교의 지옥만 묘사하겠다는 것은 오류다. 정상이 있어야 비정상이 성립할 수 있다. 불안을 조장하려면 안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탄이 지옥에서 악인을 처벌한다는 것은 신과 착한 사람들이 존재해야만 가능한 대립항이다.


★☆ (1.5/5.0)


Good : 엑소시스트 시리즈 50 주년작

Caution : 원작을 어설프게 모작(트레이싱)함


●파주주는 영화 〈엑소시스트 II〉에서 나타난 악마로,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바람의 신으로 역병을 옮기는 악귀로 불린다. 라마슈투는 수메르 신화의 악신으로 아이를 괴롭히기로 악명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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