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배우’ 안성기가 눈을 감았다. 1957년 여섯 살에 《황혼열차》로 데뷔한 후, 한평생 스크린을 빛내줬다. 정지영 감독은 안성기에 대해 “그는 너무 착한 사람이다. 포용력이 넓고 모범적이며 보기 드문 인격자”라면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서 봉사를 많이 할 뿐더러 영화계의 스타이면서 영화계의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고 앞장서서 일한다”고 말할 정도로 고인에 대해 비평하기 조심스럽다.
고심 끝에 180편에 달하는 필모그래피에서 영상자료원 웹진에 기록된 ‘안성기가 말하는 나의 영화 10편’에 기초했고, 순위만 임의로 배열했다. 고인의 코멘트는 따옴표로 그대로 옮겼으며, 아차상에 제가 기억하는 안성기 영화들을 추천드렸다. 최대한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대표작을 만나보자!
#10 : 투캅스(1993) 강우석 / 티빙
“부패의 끝, 청렴강직의 끝을 각각 대표하는 두 형사의 버디 코미디. 그 코믹함 속에서 당시 사회를 향한 통렬한 고발을 찾아볼 수 있다. 한국코미디 영화를 대표하는 만큼 촬영 현장도 굉장히 즐거웠다.”
안성기는 80년대와 90년대 초중반까지 티켓파워가 막강했다. 《투갑스》 역시 그해 한국 영화 흥행 1위에 올렸다. 1988년 박중훈과 〈칠수와 만수〉로 처음 콤비를 이룬 그들은 능청스러운 조 형사(안성기)와 FM대로 바른 강 형사(박중훈)로 분해 좌충우돌 큰 웃음을 안겼다. 당시 공직사회에 군부독재의 잔재로 남은 부정부패가 그만큼 뿌리 깊었는데, 당시 영화로는 이를 파격적으로 꼬집었다.
#9 : 무사 (2000) 김성수
“영화 ‘무사’ 속 캐릭터 진립은 주변을 보듬으며 다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동력을 만드는 인물이다. 그의 모습은 배우로서의 내 역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홀로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 뒤에서 모두를 보듬는 것.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다.”
안성기에게 생애 첫 조연상(청룡영화사 남우조연상)을 안긴 작품. 왕년의 스타 배우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20년간 머물렀던 주연이 아닌 조연배우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했던 것으로 읽힌다. 안성기는 《무사》를 통해 영화 세계의 배경, 조건, 토양이 되기로 결심한 것 같다. 전체를 바라보는 안목과 내려놓을 때 내려놓을 줄 아는 현명함이 만든 지혜의 산물이지 않을까 싶다.
#8 : 고래사냥 (1984) 배창호 / 티빙
“사람에 대한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을 유쾌하게 그려낸 영화. 개봉 당시 서울 관객만 40만명이었다고 하니 당시로선 상당히 흥행한 작품이었다. 그만큼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배창호 감독의 데뷔작 〈꼬방동네 사람들〉(1982)부터 〈흑수선〉(2001)까지 13편으로 이어지는 긴 협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 당연히 그 해 한국영화 흥행 1위에 올랐고,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로 계속해서 대박 행진이 이어졌다. 1983년에 출간된 최인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을 낙관적인 정서로 각색했다. 우리의 내면에 어디로 훌쩍 떠나고 싶다는 건 보편적인 생각이고, 상처받고 소외된 우리의 한 이웃에게 고향(동해 바닷가)을 되찾아주는 로드무비는 당대 폭발적인 흥행을 기록한다. 아마도 80년대 군사정권에 억눌린 이상과 낭만을 분출해 줄 해방구를 찾고 있던 것 같다.
#7 : 하얀전쟁(1992) 정지영 / 한국영상자료원
“‘하얀전쟁’은 전쟁의 참혹함을 정면에서 바라본 작품이다. 베트남전을 다룬 소설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던 때, ‘하얀전쟁’의 원작 소설을 접하곤 ‘제작한다면 언제든 출연하겠다’며 정지영 감독에게 이를 추천했다.”
정지영 감독은 안성기가 그간 연기해 왔던 풍자적인 세태를 반영한 캐릭터들에 약간의 터치를 가미했다. 역사적 사실을 끌고 와 좀더 구체적인 인물상을 발전시켰다. 〈남부군〉의 빨치산 ‘이태’와 베트남 전쟁 참전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고통받으며 궁핍한 소설가로 살아가는 《하얀전쟁》의 ‘한기주’가 그들이다. 두 사람은 판사 석궁 테러 사건을 다룬 2012년작 〈부러진 화살〉로 다시 성공적인 결과를 냈다.
영화는 전두환 정권 초기와 베트남 전쟁을 오가는 구성을 통해 단순히 베트남전에 대한 역샂거 비판뿐 만 아니라 당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남은 군사독재의 후유증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박정희가 헌법 제29조 제2항을 통해 군인 이중배상 금지한 것처럼 참전용사에 대한 보훈이 박하다. 2024년 12월에 국가배상법이 개정되긴 했지만, 베트남 참전 군인에 대한 관심과 처우가 열악했다는 것을 《하얀전쟁》을 통해 알게된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6 :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장호 감독 / 티빙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로 영화에 대한 검열이 엄격한 시기였음에도 고속 성장의 이면을 담아 현실을 비판적, 반성적으로 성찰한 영화. 개인적으로는 오랜 공백기 이후 영화배우로서 인정받은 첫 번째 작품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두 사람에게 의미가 깊은 재기작이다. 이장호 감독은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중단했다가 이 영화로 복귀했고, 아역 배우 이미지를 벗지 못했던 안성기 역시 성인 배우로 인정받은 첫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일남의 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시골에서 상경한 세 남자 이야기를 담았다.
이 시기 충무로는 최루성 멜로물과 호스티스 영화가 범람하던 시기에 이장호 감독은 리얼리즘을 꺼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이 제일 취약한 계층인 점은 변함없다. 고용과 주거의 불안에 젊은이들이 영끌로 내몰리는 현실은 40여 년 전이랑 달라지지 않았다.
#5 : 기쁜 우리 젊은 날 (1987) 배창호 / 한국영상자료원
“주인공 영민의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이 매력적인 영화다. 만남과 사랑, 이별이라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삶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라스트 신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
안성기 특유의 바른생활 사나이 이미지를 활용해 100% 순정남을 완성한다. 영화 홍보에 사용된 안성기 포스터 사진은 그의 영정사진이 됐다. 연극배우였던 혜린(황신혜)을 짝사랑하는 지고지순한 남자 영민 역을 맡았다. 엔리코 토셀리의 〈세레나데〉에서 딴 제목을 붙인 영화는 K-멜로영화의 고전이라 불릴 만하다. 300컷 미만으로 테이크를 길게 가져갔음에도 지루하거나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시점 쇼트를 비롯한 카메라 인칭의 변화, 기상 상태와 음향을 통해 연기나 대사에 의존하지 않고도 등장인물의 감정과 동선, 극적 재미를 전달한다.
#4 : 만다라(1981) 임권택 / 한국영상자료원
“뛰어난 예술성으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작품이다. 해외 영화인들을 만날 때면 여전히 ‘만다라’를 꼽곤 하니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두 승려의 만행길을 멀찌감치 지켜본다. 계율을 지키려는 법운(안성기)과 파계를 통한 해탈을 추구하는 지산(전무송)을 관조하고 고찰함으로써 관객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관조적인 임권택 특유의 작가적 스타일이 확립된 작품으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비롯한 해외 영화인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가톨릭교도인 안성기는 승려 역할에 몰입하기 위해 불교 전문 서적과 불경을 탐독하며 삭발 머리에 승복 차림으로 촬영 기간 내내 돌아다녔다고 한다.
#3 : 라디오스타 (2006) 이준익 / 넷플릭스
“수식어가 필요 없는 ‘사랑스러운’ 영화. 영화의 마지막, 철 지난 유명가수 최곤과 언제나 곁에 머물던 매니저 박민수는 잠깐의 이별을 끝내고 다시 서로를 마주한다. 말이 필요 없는 두 사람. 그 따뜻함이 너무나 좋은 영화다. ”
안성기와 박중훈가 찍은 네 번째이자 마지막 영화다. 몰락한 스타와 매니저의 인간적인 이야기를 다뤄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선사한다. 이준익 영화가 그러하듯 《라디오 스타》는 이 시대의 패자들의 이야기이다. 영화는 ‘라디오’라는 매개체를 통해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멜로드라마를 탈피한다.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해주는 DJ 일을 하게 되면서 최곤은 ‘스타’라는 허상에서 해방된다. 박민수(와 그의 아내)의 헌신과 영월 사람들의 순박함을 통해 철없던 남자는 ‘재기’의 가능성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 들인다.
안성기가 15번이나 재관람했을 정도로 그간 연기해온 역할 중에서 가장 본인의 성격과 닮아있어 편안하게 연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박민수의 따뜻한 얼굴을 스크린에서 만나볼 수 있지 않나 싶다.
#2 : 깊고 푸른 밤 (1985) 배창호 / 티빙·왓챠
“‘깊고 푸른 밤’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올 로케이션 촬영에 현상 또한 미국 현지에서 진행한 작품이다. 당시 국내에서 현상한 작품보다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좋은 기술이 있다면 더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예시와도 같은 작품이 아닐까.”
오프닝부터 딥 퍼플의 히트곡 ‘Highway Star’가 흘러나오면서 데스벨리를 질주한다. 안성기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좇으며 주변 여성들을 파멸로 이끄는 옴므파탈로 헛된 욕망 즉 ‘천민자본주의’의 종말을 맞는다. 배창호 감독은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허상과 욕망에 얽힌 한 남자의 비극적인 최후를 다룬 이 영화를 두고 스스로 성공의 정점에 취해 만든 실패작이라고 언급했다. 그의 의도대로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1980년대 들어와 달라진 미국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인상적으로 보여준 첫 시도로 평가받는다.
하녀(1960)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1981)
꼬방동네 사람들 (1982)
칠수와 만수(1988)
개그맨(1989)
남부군(1990)
태백산맥(1994)
축제(1996)
실미도 (2003)
화려한 휴가 (2007)
부러진 화살(2012)
한산 : 용의 출현 (2022)
#1 : 인정사정 볼것 없다(1999) 이명세 / 넷플릭스·티빙·왓챠
“국내 작품뿐만 아니라 해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이 영화의 독창성은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자주 등장하지 않는 인물(성민)에도 그처럼 묵직한 존재감을 새겨 넣지 않았나. 비중과 상관 없이 극적 존재감을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게 된 영화다.”
지난 20여 년간 주요 작품의 주인공을 도맡아 왔던 안성기가 처음 조연으로 참여했다. 그는 “주인공 형사반장 역할에서 조연인 살인자로 바뀐 작품으로, 처음엔 마음이 조금 상했지만 영화를 마치고 나니 조연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겠구나 하고 느낀 첫 영화가 됐다”고 했다. 함께 출연한 박중훈은 “안성기 선배의 비중이 크지 않았는데도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캐릭터였다”고 회상했다.
〈매트릭스〉에서 오마주된 안성기와 박중훈의 폭우 속 결투 장면을 비롯해 비주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 형사가 범인을 쫓는다는 기본 얼개 외에 '스타일리스트'로서 보여주는 미장센과 액션 장면으로 서사를 이끈다. 안성기는 대사가 단 두 마디 뿐임에도 악역으로써 강렬한 존재감을 선보인다. 그의 범행도 비지스의 ‘Holiday’를 배경음악으로 한 40계단 살인사건 외엔 없다. 그리고 깡패보다 더 깡패 같은 열혈 형사 우영민(박중훈)은 한국 영화 형사의 프로트타입으로 후세에 끊임없이 모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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