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 드르나소의 그래픽 노블 <사브리나>를 읽고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 예술이 사건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됐다. 예술장르 중에서도 특히 영화를 통해서 사람이 죽거나 다치거나 강간당하는 등의 사건들을 많이 마주하게 되는데, 그 사건을 누구의 입장에서 다루느냐가 수용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나 스스로 더 큰 자각이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라쇼몽 현상에 대해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한 사건에 있어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의 입장이나 감정이 저마다 다 다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입장 차이가 해당 사건에 대해 새롭게 생성되는 제2, 제3의 시각이나 입장에 영향을 미친다면? 모든 창작자는 언제나 이 사실을 깊이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는 픽션 작품은 장르를 막론하고 아주 많다. 살인에 의해서든 자살에 의해서든 사고에 의해서든 알 수 없는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누군가가 죽고, 그가 왜 내지는 어떻게 죽었으며 그 죽음 이전과 이후에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즉 제시된 죽음을 둘러싼 여러 궁금증을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리고 창작자 입장에서, 미스터리함을 증폭시킨 다음 예상치 못한 진실들을 서서히 밝혀가는 방식이 작품을 보는 수용자들의 흥미를 쉽게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사건과 관련이 없는, 0의 정보를 가지고 출발하는 제3의 인물인 형사나 탐정과 같은 역할을 세우고 시점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하면 사건에 관련된 숨겨진 진실이 밝혀지는 쾌감을 증폭시킬 수는 있지만, 사건 자체에 관한 감정의 공유에는 제약이 생기게 된다.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오직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이 목적인 제3자의 시선에 의해서만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사건에 관한 진실이 아무리 명백히 밝혀지고 그것이 보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내용의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 사건의 핵심적인 비극성에는 한 겹의 액자가 둘러쳐지고 만다. 본질적으로 분석되거나 이해될 수 없는 것인 비극이, 분석과 이해의 대상으로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나 피해자의 가까운 가족 및 지인들의 경우, 지나치게 사건과 가까이에 있어 이성적인 판단과 객관적인 증언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목소리가 배제되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모든 사실이 진실은 아니듯, 비극적인 사건 가장 가까이에서 미처 언어화되지도 못하는 모호하거나 격정적인, 불분명하거나 지나치게 치우쳐 보이는 그 감정과 충격이 실은 가장 진실에 가까운 무엇일 수 있다. <사브리나>는 사브리나가 당한 충격적이고 잔인한 사건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중에는 사브리나와 아주 가까우며 깊은 애정을 주고받던 사람도 있고, 그녀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사건 이후에 간접적으로 가까워지게 된 사람도 있다. 이 작품에서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는 제3의 인물들은 전부 악역이 된다. 비극을 겪은 이들은 그저 어쩔 줄 몰라하며 고통스러워하는데, 사건을 멀리서 지켜보며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이들은 곧 2차, 3차 가해자가 된다. 흡사 모종의 진실이 반드시 숨어있고, 그것을 밝혀내고야 말겠다는 의지 자체가 악의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작품에서 사건을 그저 있는 그대로, 사라진 것은 사라진 대로, 슬픈 것은 슬픈 대로,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대로 두는 것은 사브리나를 직접적으로 잃은 두 인물과 그 옆에서 시간을 함께 하는 인물뿐이다.
질문이 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대상에 관해 '권력'을 갖는 사람은 그 대상에 대해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관심이 있되 감정은 배제되어 있어야 질문이 가능하고,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거리가 부여한 권력이 그들을 질문하게 한다. 대상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은 그만큼 그와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약자가 된다. 권력을 가진 이들은 계속해서 질문하고, 대상의 측근인 약자들은 그 질문에 대답할 의무를 떠안지만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다. 이들의 침묵은 권력자이자 질문자인 이들에 의해 특정한 의미의 대답으로 해석되고, 해석은 자연히 해석자의 권력을 반영하며 새로운 권력을 해석자에게 더한다. 자의적인 질문과 해석의 반복 속에 그 원동력이자 결과물인 권력은 점점 더 몸집을 불려나간다.
다시 '예술이 사건(비극)을 다루는 방식'이라는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거리상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제3자가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려는 시선은 그 자체로 권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입장이 사회에서, 각자의 삶 속에서 거의 매 순간마다 바뀐다는 점이다. 권력을 가진 입장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고 질문 세례를 던지던 사람이, 뒤돌아서면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리는 약자가 되기도 한다. <사브리나>가 보여주는 여러 충격적이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화가 나는 모습들은, 내가 평소에 별생각 없이 사방에 던지며 살아가는 질문이라는 이름의 권력, 그 날카로운 칼날들을 돌아보게 한다. 때로는 '걱정돼서 그래', '내 얘기 같아서 그래'라는 말이나 생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들이, 정작 목표한 지점에 도착할 때는 완전한 공감 무능력의 얼굴을 하고 있곤 하는 것이다.
<사브리나> 속 인물들은 무표정이어야 할 때에 묘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얼굴로 그려지고 있을 때가 많다. 정확히 어떤 의도에 의해 그림이 그렇게 표현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발생한 사건이 비극적이라고 느낄수록 그 옅은 미소는 너무나 섬뜩하고도 비참하게 느껴진다. 독자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다음 순간 무슨 일을 저지를까 조마조마하게 되는 만큼, 어떤 일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인지하지 못하는 새에 독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반응하는 게 정상적인 범위 안에 속하는 것인지, 그 기준을 스스로 어느 정도로 정해놓고 있었는지를 계속해서 질문하게 된다. 작품의 묘사와 서술은 그 기준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혹은 넘은 듯 결코 넘지 않으면서, '나'와 '너', 그리고 '그들'에 관해 묻는다. '누가 죄인인가'를 묻는다. 아무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과, 반드시 일어날 듯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들, 또 시작도 끝도 불분명하게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 일을 서로 교차하면서 결국 그 중심에 오롯이 서있는 이의 얼굴을 비춘다. 마침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이 변하고 만 그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이 모습이야말로 바로 존재하는 유일한 진실임을 강하게 어필한다. 진실은 다른 곳에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