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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Jun 13. 2020

005 취소돼서 아름다운 영화제


안녕. 오늘은, 이 연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기분이 제법 좋은 상태에서 글을 써. 그래서 미리 예고하지만, 글이 별로 좋지 않을 거야. 글이란 건 원래 적당히 우울하고,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괴로울 때 잘 나오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이 매거진을 지루하게 한 가지 색으로만 칠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전과는 다른 색깔인 오늘도 자신은 없지만 그냥 한번 써본다.


우선 왜 기분이 좋은지가 아마 궁금하겠지? 다음 주말에는 떠나기로 했거든. 평창에 2박 3일 동안 머물면서 거기서 열리는 국제평화영화제도 구경하고 콧구멍에 강원도 바람도 좀 넣고 올 생각이야. 아까 책 읽으러 간 서점에서 몇 시간을 핸드폰만 붙들고 한참을 숙소니 교통편 예매한다고 씨름만 하다 책은 한 글자도 안 읽고 집에 왔지 뭐야. 근데 그게 꽤나 신나네. 아마 이 영화제가 올해 정상 개최되는 첫 국제영화제일 거야. 지난 몇 달간 대부분의 영화제들이 코로나 때문에 아예 개최를 포기하거나 온라인으로 제한적인 개최를 했거든. 그중에서 특히 무주산골영화제는 내가 가장 많이 기대하고 있던 영화제였는데, 너무너무 기대해서 스태프에도 지원하고 화상으로 면접까지 다 보고 최종발표만 코앞에 두고서 잔뜩 신이 나있었는데, 결국 무주도 정상 개최를 포기하고 말았어. 그때 실망감이 많이 컸던 것 같아. 물론 모두를 위한 건강한 결정이었지만, 그야말로 무주 '산골'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다양한 야외 공간에서 펼쳐지는 게 특징인 영화제였어서 기대가 컸던 만큼 많이 슬프더라. 잘은 모르지만 준비하는 분들도 많이 애쓰고 계신 게 보였거든. "코로나19에 공연예술계 '휘청'" 뭐 이런 식의 뉴스 헤드라인이 요즘 많이 보이잖아. 그만큼 오프라인 영화제 진행 소식에 영화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작게 졸이면서도 또 한편으론 크게 부풀리며 무주를 똘망똘망 바라보고 있었고 말이지. 내가 좋아하는 책방에서 한 권 집어온 무주산골영화제 책자에 쓰여있던 주최 측의 인사말을 읽고서는 눈물이 다 핑 돌 정도였어.


"(...) 이 바이러스가 고약한 건 바이러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옆 사람과 거리를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우리의 일상은 바이러스가 창궐한 이후 잠시 멈추었습니다. (...) 이렇게 불확실한 시기에 무주산골영화제가 여덟 번째 영화 소풍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영화제라니, 영화라니, 제정신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 극장에서 영화를 보며 노는 영화제가 어쩔 수 없이 열리지 못한다는 건 우리의 일상이 사라져 버렸음을 의미하기에 우리가 무주산골영화제를 예정대로 개최하기로 한 것은,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우리 일상의 복원과 일상으로의 복귀를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고 응원하고자 하는 영화제만의 작은 시도이자 조심스러운 도전일 거라고 믿습니다. 올해 영화제를 즐기기 위해 관객 여러분이 얼마나 무주를 방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린 결과에 상관없이 올해의 포스터 속 인물들처럼 한 곳을 바라보기로 했습니다. 그 시선의 끝엔 따뜻한 희망과 도둑맞은 우리의 일상이, 관객 여러분이, 그리고 늘 우리 곁에 있었던 영화가 있습니다. (...)"


사실 이 글 전문과, 개최 방식 변경 공지와 함께 홈페이지에 새롭게 올라온 다른 글 전문을 다 옮기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야. 혹시 궁금하면 찾아볼 수 있게 링크는 남겨둘게. (http://www.mjff.or.kr/kor/artyboard/mboard.asp?Action=view&strBoardID=FVMI_0UK8&intPage=1&intCategory=0&intSeq=417)


예술하는 사람들,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 '예술가' 하면 왠지 괴팍하고, 자기 세계에만 갇혀 있고, 예민하거나, 까탈스러운 이미지부터 떠오를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에 그 단어는 누구보다 섬세한 사람, 누구보다 선한 사람, 너무나 섬세하고 선해서 동물이나 사물이나 자연이나 모든 우주의 속삭임들까지 다 들어주느라 참 바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인 것 같기도 하거든. 물론 예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무리 넓게 확장한다 해도 자신은 그 안에 포함되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이 많겠지만 말이야. 무주산골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글들을 읽으면서, 다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 중에 영화제를 준비하느라 얼마나 하루하루 마음 졸이며 고생들이 많았을까, 그리고 결국 준비한 수많은 것들을 다 내려놓고 개최 방식을 온라인으로 변경하기로 결정했을 때 무너져내렸을 마음들을 어찌 다 추스를 수 있었을까, 싶어서 내 마음이 많이많이 아프더라고.


믿음에 관해서 혼자서 이런 정의를 내려본 적이 있어. 어느 날,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는 거야. 그 뒤에 내가 그렇게 기도했으니까 분명 비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는 것도 굉장한 믿음이고, 나는 비가 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가 온다면 그것은 실로 그분의 뜻인 거니까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우산을 들고 나가는 것('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이라고 부르곤 하지) 역시 대단한 믿음이라고. 영화제의 개최 또는 취소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했어.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예술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 시국'에 영화제를 개최한다는 건 아마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또 반대로, 정확히 앞의 문장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토록 소중한 영화제의 개최를 포기하는 결정 역시 내릴 수 있는 거겠지.


그리하여 이 우울한 계절에, 어떤 영화제는 취소돼서 아름답고 어떤 영화는 개최돼서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열심히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겐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으니까. 다만 모든 이의 처지가 다 다르니 선택할 땐 언제나 가능한 전부를 고려해본 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거지. 그렇게 내린 결정 뒤에는 다시금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난 이제 좀 그렇게 살아가보려고 하고 있어.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유명한 문장이 있지. 사실 못 가본 길은 아름다운 게 아니라, 못 가봤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일' 뿐이야. 지금껏 나는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나 자신이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을 버리지 못한 탓에 아깝게 낭비했거든. 물론 동기가 모든 결과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식의 결론은 절대 금물이지만, 요즘같이 팍팍한 세상일수록 한 조각의 '선한 동기'가 그렇게 하얗고 소중할 수가 없잖아.


그런 맥락에서 오늘은, 1989년에 나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마녀 배달부 키키>를 추천하면서 글을 마칠게. 이 영화랑 관련된 개인적인 이야기를 또 조금 풀어보자면, 시작은 뜬금없지만 용산이었어. 국내 개봉을 앞둔 어떤 영화의 시사회에 당첨이 돼서 그걸 보러 용산까지 갔는데 말이지, 막상 표를 받으려고 하니까 코로나 때문에 당일 오전에 취소가 됐다는 거야. 공지를 했다는데, 난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 결국 상영 중인 다른 영화 한 편을 보고 돌아왔는데, 그보다 내가 용산역에 제대로 가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날 처음으로 용산역 그 거대한 아이파크몰을 좀 구경했거든. 근데 거기에 잠실 롯데월드몰에 있는 것보다 더 근사한 도토리숲이 있더라고. 그 왜 있잖아, 지브리 굿즈 파는 귀여운 가게. 영화관을 찾아가려다 영풍문고가 워낙 거대하길래 입을 헤 벌리면서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거기까지 가게 됐는데, 글쎄 거기에 마녀 배달부 키키의 빵집하고 다락방이 지어져있지 뭐야. 누구나 그렇듯 나도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사랑하고, 미야자키 감독 애니는 대부분 봤는데 키키를 아직 안 봤었거든. 그렇게 키키네 가게랑 방까지 구경하고 나오니까 영화를 안 볼 수가 없잖아. 그래서 넷플릭스에 있길래 바로 봤는데 그 한 시간 40분짜리 영화의 무해함에 완전히 반하고 말았어. 진짜.. 별 내용 없거든? 그냥 정말 초보 마녀 키키가 배달하는 영화야. 근데 그 순수함이 너무 아름다운 거야. 심지어 지금 봐도 촌스러울 거 하나 없는데 무려 1989년도에 나온 영화라는 점까지 날 놀래켰지. 내가 좀 평소에, 뭐랄까 아픈 영화, 아프게 하는 영화, 아픔을 다룬 영화들을 즐겨보는 편인데 말이야. 키키를 보면서 세상에는 기록하고 고발하는 영화도 너무너무 필요하지만, 이렇게 물처럼 무미하나 공기처럼 무해한 영화의 존재도 아주 중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네. 내 존재의 유익하지 못함이 한탄스러울 때, 유해하지 않다는 것만도 실은 제법 굉장한 거라는 사실을 한 번쯤은 생각해볼 만하다고나 할까. 혼자서 최근에 많이 하던 생각들과는 방향성이 굉장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어서 스스로 좀 당황스러운데, 지금은 아무튼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무드인 걸로.



그럼 이만,

다른.



p.s. 하지만 키키와는 달리 넌 아주 유익하고 이로운 사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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