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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Sep 13. 2020

017 2020년 9월 13일 일요일의 아침부터 밤

사진보다 선명히 오늘의 하늘을 남기기 위해 쓰는 글



  일정이 많아 하루종일 정신 없이 돌아다녔던 토요일이 다 가고 녹초가 된 채로 알람 없이 잠들었어. 몇 시에 눈을 떠도 상관 없다는 마음으로 푹 자고 나서 깨니 아침 여덟 시가 좀 넘어있었나. 주중에 매일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반복하니, 주말이면 실컷 늦잠을 자겠다 마음 먹고 잠들어도 여덟 시 쯤이면 눈이 떠지는 게 좋아. 아무리 쉬는 날이라도 해가 중천일 때 일어나서 어영부영 밥 두어 끼 먹으면 하루 다 가있고 그런 거, 좀 별로잖아? 암튼 잠에서 깨자마자 확인한 메시지에 하늘이 예쁘다는 말이 있어서 고개를 들어서 창밖을 봤어. 내 방 침대 머리맡의 작은 창문 밖으로 어마어마하게 파란 하늘이 보였어. 흔히 쓰는 표현 있잖아, 시리도록 파란 하늘. 내 소감은 시리다기보단 오히려 따뜻한 깊음, 바다마냥 참 깊은 하늘이다, 하는 거였어. 지금 생각해도 그래, 오늘 하루종일 하늘이 어쩜 저렇게까지 파랄 수 있을까, 싶게 파랬어. 참 높고, 넓고, 깊은 그런 하늘이었어. 이렇게 내 오늘 하루가 시작됐어.


  조금 더 침대에 누운 채로 뭉그적대다 천천히 일어나 매트를 펴고 공복에 30분 근력운동을 했어. 생활습관 관리해주는 어플을 통해서 매일 한 세트씩 운동 영상이 오는데, 오늘분의 운동은 결코 만만치 않은 난이도였지만 다 마치고 나니 개운하고 상쾌했어. 운동을 마친 뒤 1층으로 내려가 씻고 간단히 아침을 먹으려는데, 거실과 주방으로 들어오는 볕이 너무 좋은 거야. 비스듬히 뜬 아침 해가 집안 깊은 곳들까지 볕을 밀어넣고 있는 모습이 어찌나 평화롭던지.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장면일 수 있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 특별하게 보여서 구석구석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 볕이 만들어내는 명암과 각도를 따라가면서. 그렇게 슬슬 오전 10시 45분이 되고, 나와 가족들은 각자 성경책을 챙겨 거실로 모였어. 언제나처럼 거실에서 TV 화면을 통해 함께 예배를 드리고 나니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옷을 갈아입고 필름카메라를 챙겨 마당으로 나갔어. 이게 정말 내가 사는 우리 집이 맞나? 내가 이걸 이렇게 함부로 보고 누려도 괜찮은 건가? 싶을 정도로 아름답던 마당 곳곳의 풍경. 오늘 이 롤을 거의 다 채웠으니 곧 스캔을 할 거야. 잘 나왔으려나 무척이나 궁금하고 기대 돼.


  아빠가 얼마 전에 커다란 텐트를 하나 마련해서 마당에 설치해뒀어. 일반적인 삼각형 모양 텐트를 생각하면 안 되고, '천막'이라고 부르면 좋을 것 같은, 그 밑에 테이블도 놓고 고기도 구워먹고 할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지붕 같은 그런 거야. 지금 우리 집 마당의 거의 절반 정도를 그 텐트가 덮고 있는 상탠데, 고놈이 아주 끝내줘. 해가 비칠 때면 그 밑 그늘에 앉아 시원하게 바람을 쐴 수가 있고, 비가 오면 그 아래서 비는 맞지 않으면서 비가 내리는 걸 아주 가까이서 보고 듣고 느낄 수가 있어. 우리는 점심거리를 가지고 마당으로 나가 그 그늘 밑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대화하며 식사를 했어. 텐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높고, 마당의 잔디들을 비추는 햇살은 밝고, 하늘이 깊은 만큼 또렷이 보이는 구름은 하얗다 못해 검고, 마당의 간지럼나무를 아무리 간지럽혀도 이 나무가 내 손길 때문에 흔들리는 건지 바람 때문에 흔들리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만한 적당한 바람은 계속 불어오고, 초가을의 공기는 춥지도 덥지도 않게 조용히 온 사방을 흐르고 있었어. 밥을 다 먹고 나니 아빠가 마당 한 켠으로 걸어가 포도나무에 아직 남아있던 포도 몇 알을 따왔어. 놀랄 만큼 달았어.


  언니가 노트북을 가지고 나와 할 일을 하고, 엄마 아빠가 커피와 디저트를 먹으면서 좀더 여유를 즐기는 동안 먼저 들어가 간단히 설거지를 마친 나는 집 열쇠와 카드만 챙겨서 집을 나섰어. 두 시에 영화를 예매해놨었거든. 집에서 영화관까지 가는 버스의 배차간격이 아주아주 긴데, 오늘은 어쩌면 타이밍이 완벽하게 들어맞아서 기다림도 거의 없이 금세 영화관에 도착했어. 영화관에 도착하기까지 실컷 구경한 하늘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어. 하늘엔 구름, 구름, 구름, 구름들. 바닥이 평평하고 위로 뭉게뭉게 솟은 그림 같은 구름들. 그 세세한 윤곽들이 하나하나 다 보여서 얼마나 입체적인지. 나는 마침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서 앞유리를 통해 넓게 펼쳐진 하늘을 똑바로 마주보며 갈 수가 있었어. 있지, 아무래도 구름 뜬 하늘만큼 예쁜 건 없는 것 같아.


  그냥 어젯밤부터 영화관에 가고 싶었어. 영화 보는 거야 항상 즐겨 하지만, 오늘처럼 여유로운 날에, 여유롭게 집에서 빈손으로 나와, 여유롭게 혼자 영화 한 편을 보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왠지 생각만 해도 정말, 여유로우니까. 볼 만한 게 있으려나 상영시간표를 살피는데, 유럽의 한 유명 감독의 특별전이 진행 중이라 내가 전부터 보고 싶었던 그 감독의 옛날 영화를 상영하고 있더라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게 나뿐이 아니었는지, 큰 상영관이 아니긴 했어도 남은 자리가 몇 개 없는 상태였어. 물론 거리두기로 한 자리씩 띄워앉아야 해서 거기서도 절반 정도밖에 앉을 수 없긴 했지만. 아무튼 영화는 기대만큼 좋았어. 좋았다,는 말이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간략히 요약하자면 '전형적인 유럽 예술 영화'라고 하겠고, 좀더 긴 설명이 허락된다면 물론 할 이야기가 아주 많아. 주인공이 미친듯이 아름다웠고, 카메라는 천재적이었고, 이야기도 참신했고, 음악은 강렬했어. 아주 약간 알고 있는 프랑스어가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제법 도움이 돼서 혼자만 아는 재미도 조금 느낄 수 있었어.


  영화를 보는 동안, 프랑스 소설이 읽고 싶어졌어.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다 올라간 뒤 언제나처럼 상영관을 맨 마지막으로 빠져나가면서 핸드폰으로 바로 아래층에 있는 서점의 재고를 확인했고, 뒤라스의 책 한 권과 신간 코너에서 다른 책 한 권, 그리고 나오는 길 매대에 있던 인센스 스틱 한 묶음까지를 구매해서 전부 한 아름 품에 안고 건물을 나섰어. 목이 좀 많이 마르기도 했고, 편한 곳에 앉아 방금 사온 책을 조금 읽거나 방금 본 영화에 대해 검색도 좀 할 생각으로 근처의 좋아하는 카페로 향했어. 분명 좋아하는 카페가 맞는데, 주일에 쉰다는 걸 알지도 못했다는 건 좀 부끄럽네. 그 카페가 닫은 걸 확인하니 특별히 다른 카페에 가고 싶지도 않아서 곧장 집으로 가려는데,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가 오기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더라고. 그래서 편의점에서 물을 한 병 사서 버스정류장 옆 광장 벤치에 앉았어. 거기 꽤 많이 다녀봤는데, 그 광장에 그렇게 머문 건 처음이었어. 잘해놨더라고. 가장자리 벤치에 앉으니 넓은 하늘과 끝없는 구름들이 쫙 보이고, 펼쳐진 광장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어. 500ml짜리 물병을 조금씩 비우면서, 1분에 한 번 꼴로 하늘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책을 읽었고, 30분이 지나 도착한 버스에 올랐고, 그 버스에서 내려 집까지 가기 위해 갈아타야 하는 버스의 도착이 한참 뒤라 그냥 세 정류장 정도 되는 거리를 천천히 걸어 집에 도착하니 딱 여섯 시가 됐어.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엄마 아빠는 내가 산책을 다녀온 사이에 사온 고기를 꺼내 마당에서 굽기 시작했고, 나는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은 다음 또 다시 필름카메라를 챙겨서 마당으로 나갔어. 엄마 아빠가 고기와 함께 사온 두껍고 쫄깃한 광어회를 먼저 맛 본 다음 마당에 사시사철 서있는 바베큐 그릴에서 아빠가 구워다주는 고기를 상추에 싸먹었고, 우리는 마당에 심겨서 자라고 있는 알이 작은 고구마와, 우리 집 가시오가피 나무를 괴롭히는 잡초와, 이 동네 어딘가에서 아빠가 본 적 있다는 두더지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러는 동안 테이블에 올려둔 세 개의 향초로 테이블을 다 밝힐 수 없을 만큼 사위가 어두워졌고, 모기가 우리의 팔다리를 잔뜩 물어뜯었고, 우린 모두 다 기분 좋게 배가 불렀어. 먹은 걸 정리한 뒤 언니와 나는 각자 방으로 올라왔고, 내가 아까 사온 인센스 스틱을 피워둔 채 이 글을 쓰는 동안, 아빠와 엄마는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어. 엄마 아빠는 항상 저렇게, 둘이서 영화를 보고 있어.



  맞아 확실히,

  뭔가 대단한 가을이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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