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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09. 똥성비 행복이다

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31일 20시 54분




  어제가 5월의 마지막 날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5월과 6월의 사이에 난데없이 오늘이라는 하루가 땅에서 툭 솟아오른 것만 같다고 느낀다. 한 달의 마지막 날이자 한 주의 시작인 31일 월요일, 이 날은 오묘한 날이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나비고Navigo’는 프랑스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교통카드인데, 종류가 상당히 다양하다. 그 중 보편적으로 쓰이는 형태가 내가 사용하는 선불형이고, 한국의 교통카드와는 달리 자유이용권 형태다. 하루 이용권, 일주일 이용권, 한 달 이용권 단위로 구매를 하면 기간 내 제한 없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인 것이다. 다만 일주일 이용권의 경우 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가 이용 대상 기간이고, 한 달 이용권은 달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가 해당한다. 5월 20일부터 6월 20일까지 하는 식으로 쓸 수는 없다는 거다. 나는 오늘로 프랑스에 도착한 지 3주 정도가 됐고, 따라서 매주 일주일 이용권을 충전해서 사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일주일 이용권을 충전할 때는 야심차게 6월 한 달 이용권도 결제를 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스템이라 괜히 설명이 길었는데, 결국 오늘은 내가 충전한 일주일 이용권과 한 달 이용권 어느 것으로도 교통카드를 이용할 수 없는, 월요일이자 월말인 하루였다는 이야기다. 이 애매했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이 애매했던 하루가 저물고 있다. 너무도 빠른 속도로 저물어가고 있다. 나는 매일 오전 11시 10분부터 13시 10분까지, 20분 쉬는 시간 후 다시 13시 30분부터 15시 30분까지 어학원 수업을 듣는다. 20분 동안 빠르게 점심을 해결해야 한다. 하루 세 끼 충실히 챙겨먹는 걸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는 나의 최대 불만이다. 그래서 오늘은 쉬는 시간에 학원 앞 공원에 앉아서 미리 챙겨간 샐러드를 한없이 느리게 먹다가... 그냥 오후 수업을 통으로 쨌다. 하루 종일 하늘에 구름 한 점이 없는 날씨였다. 전동 킥보드 라임을 하나 주워 타고 한적한 13구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집으로 왔다. 좋은 날씨를 누리기에 전동 킥보드만 한 게 없다. 자전거 타는 재미와는 또 다르다. 꼿꼿이 선 채 온몸으로 바람과 속도를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꼿꼿이 서서, 오르막길 따위는 우습게 미끄러져 올라간다. 태양빛은 뜨겁게 내리쬐지만 습하지 않아 땀이 잘 나지 않는다. 이곳엔 보도마다 대체로 한켠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마련돼 있고, 다 지워져가는 자전거 그림 위를 대체로 보행자들이 걸어다니는 한국의 자전거 도로와는 달리 정말 차도에 차가 다니듯 자전거들만이 그 길을 오간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자전거와 킥보드들이 그냥 차도 위를 달리곤 하는데, 적당히 서로 비켜주면서 조화롭게 통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지만 나는 아직 넓은 차도를 다니기는 영 무서워서 민폐가 되는 줄 알면서도 보도 위에서 킥보드를 타는 편이다. 그러면 보행자들에게 심심찮게 말을 걸게 된다. 빠흐동(Sorry, 내지는 Excuse me). 주위에 아무도 없는 너른 길을 쌩하고 달려갈 때의 쾌감만큼, 천천히 속도를 조절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 일도 즐겁다. 여전히 태양빛은 강렬하게 내리쬐고, 내 속도에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달리다 보면 슬슬 본능적인 불안감이 찾아온다. 그 때가 되면 눈알을 굴려 라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차 스팟을 찾아 얌전히 라임을 반납한다. 21분 라이딩에 7320원. 똥성비 행복이다.


  그러니까 오후 수업을 통으로 째고 겨우 20분 남짓 킥보드를 탄 뒤에 거기서 다시 20분 정도 걸려서 집에 왔을 뿐인데, 정신 차려 보니 저녁 시간이고 여느 때처럼 손 가는 대로 파스타를 만들어먹고 설거지를 마쳤더니 이 시간이다. 해는 이제야 저물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슬슬 하루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된 것 같은데. 오늘이 가기 전에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덤으로 얻은 하루여서 본상품보다 빨리 닳았나? 한 달의 마지막이자 한 주의 시작이었던 오늘, 나는 아무것도 끝내지 못하고 어떤 것도 시작하지 못했는데, 왜 걸어가는 이의 옆을 스치는 날쌘 킥보드마냥 이 하루는 나를 제치고 지나쳐버렸나.


  요즘 도통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등허리까지 뻐근하곤 하다. 허나 과섭취한 탄수화물보다, 하루하루의 시간을 제대로 소화해내는 일이 더 버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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