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30일 23시 07분
출국 준비를 하면서 필요했던 것들 중 하나는 증명사진이었다. 비자 신청을 위해서는 3개월 이내 촬영한 특정 규격의 증명사진이 있어야 했다. 친구 한 명의 놀라운 결과물을 목격한 뒤 이름을 잘 기억해두었던 사진관에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나보다 훨씬 예쁜 나의 사진이 탄생했다. 내 사진이지만 사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내 눈보다 큰 눈과 내 턱보다 갸름한 턱과 내 코보다 예쁜 코를 갖추고 있는 내 것 아닌 내 얼굴. 그러니까 가끔은 이런 일이 일어난다. 실제보다 근사한 사진들이 탄생한다. 하지만 대개는, 아무리 노력해도 사진이나 영상으로는 담을 수 없는 순간들을 마주하는 일이 더 많다. 오늘이 그런 날들 중 하나였다.
파리에서 ‘날씨가 좋다’는 것은, 같은 일이 서울에서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의미하는 바가 크다. 첫째 이유는 워낙 날씨의 변덕이 심하고 자주 흐린 탓에 맑게 해가 비치는 시간들이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이곳이 좋은 날씨라는 조명을 받으면 무한한 잠재력으로 발광하도록 아름답게 빚어져있는 도시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결코 이처럼 날씨에 예민해본 적 없다. 비가 내리나, 구름이 꼈나, 해가 비치나, 확인하러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본 적 없다. 뭐랄까 날씨란, 서울이라는 도시가 작동하는 알고리즘에는 없지만 파리라는 도시를 움직이는 알고리즘에는 분명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날씨 좋은 주말이었다. 이것은, 모든 파리 시민이 바깥으로 나왔다, 라는 말로 바꿔 쓸 수 있는 문장이다. 나와 한나도 주말의 피크닉을 계획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에서는.
집 바로 옆에 근사한 공원이 있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아주 잘 되어 있다. 피크닉 매트와 먹을거리를 챙겨 신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네 개의 발을 동동거리며 공원으로 향했다. 공원에 심겨진 나무 한 그루마다 쉴 만한 그늘 하나씩, 그늘 하나마다 한 무리씩의 동네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거나 눕거나 기대있었다. 그늘과 그늘 사이 해가 비치는 너른 공간에는 뛰며 공을 차는 아이들,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들. 공원은 그렇게 완벽히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스미듯 그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으면, 다시 또 새로운 완벽함으로 넘실거리며 박동하는 공원.
내리쬐는 햇빛은 뜨겁지만, 나무 그늘 밑에 들어와 있으면 놀랍도록 서늘하다. 태양의 더운 눈빛을 뎅강 잘라내버리는 구역. 거기서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선명하게 푸른 하늘을, 휘휘 늘어진 구름들을 목격한다. 그것들이 함께 모여 벌이는 짓들을 바라본다. 생생함. 습관대로 핸드폰을 들어 이리저리 찍어보지만, 한 장 한 장 찍는 행위마다 패배의 전적만이 쌓여간다. 자연에 결코 비기지 못하는 셔터.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서로의 살아온 시간들을 한 움큼씩 건네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핸드폰을 보고, 그 모든 것들을 둘러싼 풍경을 감각하며 풍경의 일부가 되어간다. 저녁 시간이 지나가도 사위는 여전히 밝고, 피부에 닿는 공기의 온도만이 서늘하게 저문다. 하늘도, 햇빛도, 이 공원과 잔디와 나무와 그늘과 공기의 흐름 그 어느 것 하나도 내 손으로 만든 것 없으니 이 모든 시간의 이름은 축복이다. 축복 속을 마음껏 유영하며 하는 생각. 이 좋음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아 다행이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대체할 수 없는 총체적인 경험들이 존재해서 다행이다. 어떤 예술도 침범할 수 없는 실제의 영역. 그 경험의 우주. 아직 기억으로 손질되기 전인 날것의 재료. 삶은 그것들로 되어져있는 거라는 걸 배울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얼마나 다행인지를, 글로 다 적어낼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