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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10. 한국 누아르 장르에는 미래가 있는가

2021년 6월 1일 파리 시간으로 20시 29분




  한국 누아르 장르에는 미래가 있는가. ‘누아르noir’ 영화의 정의를 찾아보면 noir, 즉 ‘검다’라는 프랑스어 단어의 본래 뜻처럼 전체적인 분위기가 어두운 영화를 통칭하는 것으로 그 범위가 상당히 넓지만, 나를 포함한 한국의 관객들이 ‘누아르’라는 단어를 들으면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갱스터 누아르 장르를 오늘의 글에서는 ‘누아르 영화’라고 통칭하겠다.


  <낙원의 밤(2020, 박훈정)>을 뒤늦게 봤다. 공정하지 않은 처사라는 것을 알지만, 영화를 보기 전부터 이미 한껏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나도 웹서핑과 SNS라는 걸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흔한 한 명의 영화팬으로서, 나는 지난 수년간 한국 누아르 영화들의 잇따른 실패를 시시각각 목격해왔다. 그런 작품들의 제목을 일일이 나열하고 싶지는 않다. 마음 아프니까. 다만 한국 영화계가 <친구(2001, 곽경택)>로 시작해 <달콤한 인생(2005, 김지운)>, <비열한 거리(2006, 유하)>, <타짜(2006, 최동훈)> 등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린 2000년대 한국형 누아르라는 상아탑을 <황해(2010, 나홍진)>, <부당거래(2010, 류승완)>, <범죄와의 전쟁(2012, 윤종빈)> 등으로 잘 이어받은 다음 <신세계(2013, 박훈정)>를 마지막으로 한국 누아르의 장엄한 장례식을 치렀다는 생각을 해온 것이 결코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가히 <신세계>는 하나의 엄중한 장송곡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온 국민의 가슴 속에 마스터피스로 남았다. 내가 박훈정 감독이었다면 <신세계> 이후로 밤마다 잠이 안 왔을 것 같다. 그걸 무슨 수로 뛰어넘어.


  그러나 박 감독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세계> 이전에 이미 <악마를 보았다(2010, 김지운)>와 <부당거래>의 각본을 집필한 바 있는 그는 2016년 <V.I.P.>, 2018년 <마녀>로 누아르 장르에 대한 뚝심을 보여줘 왔다. 나는 그걸 고맙게 생각하는 편이다. 이번 <낙원의 밤>을 포함해, 박 감독은 단지 <신세계>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마녀>나 <독전(2018, 이해영)> 같은 영화들의 새로운 시도는, 전체적인 작품성과는 별개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런 새로운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극복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음을 느낀다. 감독이나 출연진 및 기타 제작진들의 역량과는 무관하게, 누아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시대적인 장벽의 존재. 정장 입고 온몸에 문신을 한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늘 같은 이유로 서로를 찌르고, 주인공은 반드시 조직에 배신당하고 피의 복수를 감행하며, 영화에 딱 한 명 등장하는 젊은 여성은 어쨌든 늘 인질로 잡혀있는 영화를 지금 시대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사극 영화를 찍는 것과 같은 고증의 방식이 필요하게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허나 한편으로는 다른 생각도 든다. 과연 <친구>나 <타짜>, <부당거래>와 <신세계>가 조금의 과대평가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고마해라, 마이 뭇다 아이가’와 ‘동작 그만, 밑장빼기냐?’, ‘호의가 계속되면은, 그게 권리인 줄 알아요’, ‘드루와, 드루와’와 각 영화들을 그 자체로 동일시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물론 이 영화들에는 훨씬 더 많은 명대사와 유행어들이 있고, 특히 <타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영화의 모든 대사를 거의 통째로 외우고 다니는 일이 심심찮은 수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까 한국 누아르가 망해가고 있다고 쉽게 이야기하기보다는, 머잖아 그와 같은 날선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2010년대 후반의 누아르 영화들이 언젠가 때를 만나 재평가되는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심을 품어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구성하는 것은 스토리나 촬영이나 연기 등이 전부가 아니다. ‘스타일’은 생각보다 중요하게 영화를 전체적으로 좌우한다. 그리고 이 ‘스타일’에 가장 예민한 장르 중 하나가 바로 누아르 장르가 아닐 수 없다. 국가를 불문하고 누아르 영화의 인물들은 늘 피칠갑을 한 채 죽어가지만, 기이할 정도로 많은 말들을 남기고, 때로는 시니컬한 농담까지 하며 서서히 숨을 끊어가지 않던가. 죽을 때 죽더라도 스타일 구길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어이 거기 누구 담배 있으면 하나만 줘라. 뭐 갈 때 가더라도, 담배 한 대 정도는 괜찮잖아? ... 거 죽기 딱 좋은 날씨네.’ 하는 대사까지 있겠나. 물론 최근 줄줄이 흥행에 참패하며 비평가와 관객들 모두로부터 쓴소리를 뒤집어써오고 있는 누아르 영화들이 비판받는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스타일에만 신경 쓴 나머지 다른 중요한 것들을 다 놓쳤다는 것. 물론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그 ‘스타일보다 중요한 것들’을 기본적으로 챙기기가, 예전보다는 너무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은 맞는 듯하다. 그러니 가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누아르의 기본은 처음부터 다시 쓰여야만 한다. 조폭이 뭔지, 범죄가 뭔지, 배신이 뭐고, 복수가 뭐고, 살인이 뭔지, 하나하나 다시 점검해봐야만 한다. 그러고서야 누아르 영화가 다시 숨을 이어갈 수 있다. 아니,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헐리웃처럼 몇 개의 시리즈물만으로 장르의 명맥을 간신히 이어간다면, 누아르는 마치 아무도 쓰지 않지만 사전에는 버젓이 등재돼있는 사어死語와 같은 장르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사진은 영화와는 딱히 상관 없는, 며칠 전 파리 Montorgueil가의 모습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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