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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07.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다

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30일 00시 42분




  수요일에 화이자 1차 접종을 한 뒤 금요일까지 내리 집에서 쉬었지만 여전히 몸 어딘가 고장나있음이 느껴진다. 가령 소화제를 아무리 먹어도, 명치 어디쯤이 꽉 막혀 등허리까지 고이듯 아픈 느낌이 가시지를 않는다. 차라리 좀 움직이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집을 나선다. 목적지는 언제나 집 현관을 나서기 직전, 내지는 집 앞 전철역으로 향하는 동안, 때로는 이미 전철에 몸을 실은 뒤에야 정해진다. 집에서 점심을 해먹은 다음 나갈 준비를 하면서 막연히 몇 군데를 떠올려 본다. 많은 사람들이 권했고 그 명성만큼은 나도 잘 알고 있던, 하지만 에펠탑이나 노트르담보다 집에서 먼 편이라 아직 가보지 못한 몽마르트. 오늘은 그곳에 가보기로 한다.


  파리 지하철 2호선과 4호선의 환승역인 Barbès-Rochechouart 역에서 내린다. 지하철에서는 꾸벅꾸벅 졸다 간신히 내렸다. 간밤에 잠을 설쳤다. 전쟁 중인 일본에 관광 가는 꿈을 꿨다. 사람들이 내 옆에서 죽어가는데 나는 여행을 와있었다. 그 와중에 날 많이 사랑하는 한 친구는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에서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사들고는 그곳까지 찾아왔다. 말도 안 되지만 프랑스에 와있는 지금 내 상황과 전체적인 맥락이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최근 앨범을 낸 성시경도 거기 있었다. 파리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다. 두툼한 가디건이 알맞은 날씨였다. 테라스에서의 취식이 가능해졌지만 테라스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쌀쌀했다. 낮은 기온은커녕 비가 오더라도 아랑곳 않고 밖에 나와 앉아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지만. 그러다 엊그제부터 갑자기 해가 들고 기온이 올랐다. 느닷없이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하늘은 비현실적으로 선명하고, 따뜻하다 못해 따끔할 정도로 내리쬐는 햇살 아래서는 금세 땀방울이 맺혔다. 찢어진 청바지에 짧은 반팔티를 입고 나온 나는 지하철 출구로 나오자마자 풀어헤쳤던 머리를 높게 묶었다. 좋지 않았다. 허리가 절로 휠 만큼 명치가 아팠고, 걸음마다 피로가 느껴졌다. 배가 고픈지 배가 부른지 목이 마른지 알 수 없었다. 계속되는 갑갑한 느낌에 일단은 계속 걸어보기로 한다. 뜻밖에 동대문과 청계천 인근의 각종 의류 부자재시장과 흡사한 모습이 펼쳐진다. 주로 옷감을 파는 가게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언뜻 보이는 옷감들의 재질이 대체로 독특하다. 일반적인 기성복의 옷감이라기보다는 특정 전통의상들의 재료가 되는 천으로 보인다. 알록달록하면서도 부드럽고 가볍다.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지나친다.


  머잖아 계단, 높은 언덕, 그 위의 커다랗고 새하얀 건물이 보인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몽마르트 언덕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나는 일단 그쪽으로 향한다. 지상에는 조악한 회전목마가 빙빙 돌고 있고, 성채와 같은 새하얀 높은 담들을 따라 시선을 끌고 가면 하늘을 향해 둥근 세 개의 지붕을 봉긋 올리고 있는 새하얀 성당의 모습이 비현실적이다. 회전목마 옆 벤치에 앉은 여자의 흰색 티셔츠와 비교하면 사실 그다지 하얀 색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쪽만 채도를 제거한 것처럼 창백하다. 회전목마와 성당이 한 화면에 잡힌 사진을 보면 마치 성당과 담벼락만 아직 완성하지 않은 채 남겨놓은 색칠공부 책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진다. 성당은 온통 둥근 외곽선, 아치형으로 뚫린 문들로 가득하면서도 날카롭고 자비 없는 위엄을 내뿜고 있다. 장사하는 사람들, 구경 나온 시민들이 아무리 줄을 이어도 해칠 수 없는 고고함이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채 파리의 정수리에 똑바로 꽂혀있다.


  한국의 티머니 카드처럼 (충전 및 이용 방식은 다르지만) 이곳에서 흔히 사용되는 교통카드인 나비고 카드가 있으면 따로 요금을 지불하지 않고도 리프트를 타고 편히 언덕을 올라갈 수 있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성당 전면으로는 마치 스키장처럼 경사진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나무들 사이로 그 잔디밭에 기대 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언뜻 언뜻 보인다. 날이 좋다. 햇살을 받는 나뭇잎은 빛나고, 잔디의 연둣빛은 선명하고, 그곳에 드러누운 이들의 무릎은 뾰족하다. 언덕 꼭대기에 도착하니 듣던 대로 파리 전체가 굽어보인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넓게 트인 시야, 그것을 배경으로 춤을 추는 사내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그런 내 뒤통수를 사크레쾨르 대성당이 같은 각도로 내려다보고 있다. 컨디션이 좀 안 좋아도 그 내부를 한 번 훑어보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성당 입구로 발길을 향한다.


  완전히 고개를 위로 꺾어야만 성당 전면이 보이는 가파른 각도로 계단을 오를수록 성당이 가까워진다. 도착하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완벽한 형태의 아치들이다. 밖으로부터 무언가를 강하게 빨아들이는 듯한, 그리고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 듯한 깊은 동굴 같은 아치들. 그 아치 밑으로 들어가면 바깥 하늘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아치 형태로 깎여버린 하늘의 모습이, 아까 내려다본 파리 전체의 모습보다 어쩐지 더욱 인상적이다. 안내 표시에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선다. 여기서부터 단 한 장의 사진도 없다. 내부에 첫 발을 디딘 순간부터 동선에 따라 반 바퀴를 돈 다음 중앙에 앉아 잠시 기도한 뒤 다시 밖으로 나오기까지, 나는 다만 끝도 없이 울기만 한다.


  시간이 흐르면, 아무런 상상도 기대도 없이 성당 내부로 발걸음을 들여 그 지붕 아래 내 전신을 두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그저 마구 흘러내리던 눈물의 이유를 알 수 있게 될까. 물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성당은 압도적이다. 천장을 거대하게 수놓은 유명한 금빛 모자이크 속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근엄한 얼굴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장대한 그림 속 신의 거룩함보다 나는 어쩌면, 성당 안 군데군데를 메우고 있는 촛불들과, 예배하는 이들이 몸을 기대는 의자들과, 성당 가장 안쪽에서 성도와 마주앉아 기도하고 있는 신부님들과, 건물 곳곳을 빈틈없이 메우고 있는 온갖 장식물들, 그리고 그 공기, 1800년대부터 그곳에 흐른 수많은 이들의 숨이 밴 공기에서 먼저 무언가를 감지했던 것 같다. 너무 많은 기도와 너무 많은 간구, 너무 많은 좌절과 너무 많은 소망들. 신의 앞에 나아와 그저 주여, 하고 그분을 찾는 한 번의 숨결에 이미 모든 의미를 담아버린 셀 수 없는 입술들. 그 모든 정수리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천장의 황금빛 예수 그리스도의 표정은 정확히 성당의 창백한 외벽을 닮아있었다. 좌우로 크게 뻗은 손은 높은 곳에서 모두를 맞이하는 성당의 윤곽선처럼 만민을 부르지만, 정작 그 눈을 들여다보면 그저 아치형으로 뚫린 심연 속에서 차라리 나 자신의 눈동자를 마주 볼 수밖에 없는 잔혹한 전능함만이 존재한다. 그 아래 고개를 숙이고 앉아, 뇌까릴 수 있는 기도는 별 게 없었다. 그저 그 전능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 나의 소름끼치는 유한함을 온몸으로 인식하면서 그 초월자의 이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러보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렇게 쫓기듯 서둘러 빠져나왔다. 그 지붕 아래 머무는 시간만큼 울 수밖에 없을 것 같아서, 근데 내 가방에는 휴지가 없어서, 탈수로 쓰러지는 일은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마치 영적인 블랙홀과 같이, 인생의 물리적 시간을 일부 빼앗긴 듯한 곳으로부터 다시 파란 하늘 아래로 나가면, 멈췄던 생이 다시 시작되는 기분과 마주한다. 여기는 관광지. 날씨가 좋아 나들이를 나온 가족 친구 연인들의 몽마르트 언덕. 다시 내려갈 땐 여유롭게 계단을 이용한다. 등 뒤에는 시간을 삼킨 대성당이 새하얗게 고여있고, 정면에는 넓고 파란 하늘, 아래로는 초록색 잔디, 검은색 휴대폰을 손에 쥔 검정머리의 내가 이 모든 빛깔들을 눈에 담으며 언덕을 내려가면,


  눈치 채지 못한 어느 순간부터 몸의 통증은 말끔히 사라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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