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5월 27일 22시 51분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한국에서는 15년 동안 단독주택에 살았기 때문에 층간소음을 모르고 살았다. 층간소음이 단순히 이웃 간의 다툼을 야기하는 사적인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수준에서 논의되는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핍진하게 다룬 정소현 소설가의 중편 소설 <가해자들>이 출간되자마자 읽은 바 있다. 그러니까,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사건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이 아파트에 처음 입주한 날부터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쿵쿵대는 소리, 그러니까 가구를 두드리거나 신발을 신고 뛰어다니거나 하는 생활소음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쿵쿵 소리는 리듬을 갖고 있었다. 상당히 규칙적이고, 음악적인 리듬. 쿵쿵 딱. 쿵쿵 딱. 쿵쿵 딱. 쿵쿵 딱.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여러 상상을 해봤다. 차라리 피아노나 기타 같이 선율을 연주하는 악기 소리가 들린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 (아마 아니겠지) 둔탁하게 울리는 타악기의 소리는 마치 내 귀가 아닌 심장에 라인을 연결한 듯 박동한다. 쿵쿵 딱 쿵쿵 딱 쿵쿵 딱쿵 따다다다 쿵쿵 딱 쿵쿵 딱. 두근 쿵 두근 쿵 두근두근 쿵 쿵.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아마추어 드러머라고 생각한다. 확실히 아직은 연습이 필요하다. 리듬이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실수가 잦다. 듣고 있다 보면 어느새 응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아니지, 조금 빨랐어. 아이고, 또 틀렸네. 그렇지. 잘하네. 좀만 더하면 되겠다. 그래 어서 완벽해져서, 연습 따윈 필요 없는 탑 드러머가 돼버리란 말이야. 세계적인 밴드에 섭외돼서 월드투어라도 떠나버리란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유명해지면 그게 다 아래층에 살던 내 덕분인 줄 알라구.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마 그런 것 같다. 그는 상식적인 사람이다. 저녁 시간 이후에는 절대 드럼을 치지 않는다. 오, 그렇다면 본인의 드럼 소리가 제법 시끄럽다는 걸 알고 있나 보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낮 시간을 이용해 열심히 연습을 하는 걸 보면 꽤나 중요한 연습인 게 분명하다. 사실은 프로 드러머일지도 모른다. 유명한 가수들도 매일 음정 연습을 하지 않는가. 그도 드럼스틱 두 개 붙들고 자식새끼 다 키워치운 베테랑 드러머지만, 그럴수록 실력이 녹슬지 않게 하기 위해,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젊은 드러머들에게 밀려나지 않기 위해 매일 반복해서 기본 리듬을 연습해야만 한다. 쿵쿵 딱. 쿵쿵 딱. 쿵쿵 딱. 먹고살기 힘들다.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아닐 수도 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아래층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들겨대고 있는 내가, 사실은 작가가 아니듯이.
위층에 드러머가 살고 있다. 확실하다. 저게 드럼소리가 맞다면, 그는 드러머가 분명하다. 출판한 적 없지만 매일 쓰는 내가 만일 작가라 불릴 수 있다면, 공연하거나 녹음하지 않는다 해도 이처럼 매일 꾸준히 드럼을 치는 사람을 대체 누가 드러머가 아니라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나는 그를 드러머라 명명할 것이다. 소망하는 마음으로. 멍청한 꾸준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