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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05. 복수. 난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26일 21시 32분





  해마다 못해도 100편에서 200편 가량의 영화를 보는 편이다. 영화관에 갈 때도 있고, 대체로 넷플릭스나 왓챠를 이용하고, 상영관도 없고 넷플왓챠에도 없는 영화는 개별 구매해서 보기도 한다. 토렌트는... 졸업했다. 올해는 상당히 부진한 편이다. 이유는 명확하다. 난데없이 미드에 빠졌기 때문. 나는 온갖 서사 예술들을 감상하는 일을 사랑하지만, 지구력이 상당히 구린 탓에 시리즈물은 도통 시작하지도, 끝내지도 못하는 편이다. 그게 내가 지금껏 드라마가 아닌 영화를 즐겨 봐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가장 큰 두 번째 이유는, 드라마의 가벼움 때문이었다. 많은 드라마 팬들의 반박이 예상되는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다. 어차피 지금은 나도 그 ‘가벼운’ 드라마에 빠져있으니까. 내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상대적 가벼움은, 당연하게도 그 포맷 자체에 이유가 있다. 2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에 압축적으로 메시지를 담아내는 영화와 달리 드라마는, 매 화가 끝날 때마다 시청자가 거기서 경주를 그만두지 않고 미련 없이 다음 편으로 이어달리기를 할 수 있도록 온갖 매력 요소를 뿌리고 칠하고 버무려야만 한다. 전형적인 미모의 배우들, 전형적인 고구마와 사이다, 귀에 꽂히는 대사, 이것저것 다 별로여도 끝내 뇌리에 남는 비주얼적 쾌감,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다. 압축하고 농축시키기보다는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넓게 폈으니 얇아질 수밖에 없는 법. 내가 한 번 손에 쥐면 끝장을 볼 때까지 놓지 않는 얇고 기름진 감자칩처럼, 그 얇고 맛난 굿 플레이스며 프렌즈며 모던 패밀리를 차례로 끝장내다 보니(역설적이지만 나는 이 드라마들의 ‘얇지 않음’ 또한 길고 긴 글을 통해 얼마든지 역설할 수 있다) 올해는 반년이 다 되도록 영화를 서른다섯 편밖에 못 봤다. 음... 사실 지금 처음 세 본 건데 꽤나 충격적이다. 아무튼 올해의 서른다섯 번째 영화를 오늘, 이곳 파리에서 봤다.


  사실 이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을 만나게 된 데는 ‘마침내’라는 부사가 붙을 만한 작은 사연이 있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영화는 (윤여정 씨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지난 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수상한 영화로, 한국 관객들에게는 특히 디카프리오가 연기한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인생을 건 그녀, 데이지 뷰캐넌 역을 맡으면서 잘 알려진 캐리 멀리건이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캐리는 이 작품으로 2020년 LA 비평가 협회상과 2021년 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아카데미 시상식의 수상 결과를 예측하면서 각본상 후보에 오른 작품들 중 가장 확률이 높은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과 이 영화 가운데 이 영화가 수상을 하게 된다면 매우 신선한 선택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그리고 결국 자신의 ‘촉’을 따라 <프라미싱 영 우먼>의 수상을 예측했고, 적중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을 전후로 CGV에서는 예년처럼, 그러나 예년보다 더 발전한 형태로 ‘아카데미 특별전’을 열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요 후보작들을 여러 상영관들에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프라미싱 영 우먼>은 특별전 이전에 이미 국내 개봉을 했었고 나는 당시 광고 영상을 봤지만 크게 흥미롭게 생각되지는 않아 관람하지 않았었다. 그러다 이 영화가 그토록 ‘신선한 각본’으로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올라있다는 사실을 안 뒤에는 크게 호기심이 생겨 급히 상영관을 검색했지만 거의 없다시피 했고, 출국일이 다가오면서 끝내 보지 못한 채 한국을 떠야만 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나는 집 근처 멀티플렉스에서 이 영화가 ‘오리지널 보이스’, 즉 영어로(프랑스에서는 국외 영화의 경우 프랑스어로 더빙을 한 버전을 많이 상영하고, 그러면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 적절한 시간에 상영한다는 사실을 알고 기쁘게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원어인 영어 대사에 불어 자막의 도움을 약간 받아 대사의 대략 80퍼센트 정도를 이해한 것 같다. 한국어 자막으로 보다 온전하게 이해했으면 조금 달랐을 수도 있지만, 다행히 전체적인 감상에 크게 방해가 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영화 내용의 스포일러가 포함되므로 원치 않으면 읽기를 중단하기 바란다. 하지만 내 생각에 이미 한국 영화관에서 상영이 끝났고 넷플릭스나 왓챠에도 없는 이 영화를 굳이 찾아서 볼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잘라 말하건대 관련 주제에 크게 관심이 있거나 캐리 멀리건의 빅팬이 아닌 이상은 반드시 보라고 추천할 정도의 영화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튼, 예고편과 시놉시스 상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상식적으로 유추 가능한 선에서의 내용을 먼저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주인공인 카산드라는 30세의 여성으로, 의대에 다니다가 자퇴한 적이 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단짝친구였던 니나가 같은 학과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자살했기 때문. 이후 카산드라는 니나의 복수를 위해 매주 클럽에 가서 심하게 취한 척을 하고, 그런 본인을 걱정하듯 다가와 결국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서 옷을 벗기는 남자들을 따끔하게 혼내주는 일을 반복한다. 이제부터는 진짜 스포일러이자 영화에 대한 내 감상이다. 영화의 중반, 아니 2/3 정도까지만 해도 나는 상당히 실망한 상태였다. ‘각본상’을 수상했다는 데서 비롯한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연출이 스타일리시하긴 하지만 각본상으로는 어떤 특별함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해당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여전히 나이브한 태도이지 않나, 하는 불편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성폭행 피해자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복수를 위해 밤마다 놀랄만큼 예쁘게 치장하고 클럽에 가서 남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이라니. 그러나 마지막에 반전이 있었다.


  사건 당시 니나는 심지어 영상이 촬영되고 있는 가운데 여러 남학생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 그 주동자였던 알 먼로는 7년이 지난 지금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동기 중 알이나 다른 가해자 학생들과 가깝지는 않으나 연락을 유지하고 지내던 라이언(보 버넘분)은 우연히 카산드라와 재회해 연인이 된다. 라이언의 진심어린 구애에 카산드라는 어렵사리 마음을 열지만 결국 그 역시 당시의 가해자 중 한 명이었음을 알게 되고, 카산드라는 그런 라이언을 협박해 알의 총각파티 장소를 알아낸다. 스트리퍼로 분장하고 그곳에 찾아간 카산드라는 모종의 복수를 감행하려다 거꾸로 알에 의해 살해당하고 만다(!). 그렇다. 본격 주인공 죽는 영화다. 알은 시신을 목격한 친구와 함께 사건을 묻으려 카산드라의 시체를 불태운 뒤 아무 일 없던 듯 새신랑이 되어 결혼식에 참석하는데, 역시 결혼식장에 있던 라이언의 휴대폰으로 카산드라의 예약문자가 도착한다. 끝난 줄 알았지? 이제 시작이야. 하는 내용의. 카산드라가 알에게 찾아가기 전 만일에 대비해 준비해두었던 대로 경찰이 결혼식 현장을 급습해 알을 체포하고, 카산드라의 시신을 태운 장소 역시 경찰에 의해 발견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우선 영화를 다 본 뒤의 첫 소감은, 이동진의 표현대로 ‘영화 각본의 교과서’ 같다고나 할 수 있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을 제치고 이 영화에 각본상을 준 아카데미가 꽤나 용감한 동시에 또한 전형적이라는 느낌이었다. 용감한 이유는 영화 전체의 러닝타임에서는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인 기발한 비틂, 그 신선함에 그렇게나 큰 점수를 줬다는 사실 때문이고, 전형적인 이유는 결국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주제 자체가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적’이라서 상을 수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각설하고, 주인공인 카산드라가 정말로 죽는 부분, 이후 평온하게 가해자들의 삶이 이어지는 부분, 그리고 카산드라의 사후에 정의가 구현되는 부분이 크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가해자가 스스로를 가해자로 인지조차 하지 않은 채 평화롭고 풍요로운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모습이 실제 현실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걸 영화에 정말로 구현해낸다는 것은 꽤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복수. 난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받은 피해를 똑같이 되갚아줄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아버지가 죽임당한 방법 그대로 죽인다고 해서 똑같은 아픔을 줄 수 있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그 원수의 아버지를 죽이거나 자식을 죽이는 것도 그다지 공평하지가 않다. 성폭행의 경우는 어떨까? 복수는커녕 피해의 보상 비슷한 것이나마 도대체가 가능한 일일까? 나는 이 영화의 다른 어떤 요소가 아니라, 결국은 친구의 죽음 이후 복수라는 이름 아래서 몇 년이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머물고 있는 카산드라의 모습, 그와 반대로 승승장구하는 의대생 가해자 및 방관자들의 모습을 영화적으로 구현해낸 것에 가장 큰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복수? 그것은 어차피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영화를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가. 끝내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게 하는 것.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어떤 영화의 결말보다도 참신하고 깔끔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영어 공부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영어 외의 제2외국어를 추가로 배울 것을 추천한다. 갑자기 영어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프랑스살이 3주째, 프랑스어 자막 달린 이 미국 영화를, 내가 얼마나 피쉬 앤 칩스 먹다 김치 만나듯 반가워하며 봤는지 한번 상상해봐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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