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24일 00시 06분
도착한 지 2주가 지났다. 그 말인즉슨, 하루 세 끼로 계산했을 때(나는 하루 한 끼도 거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제법 정확할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총 마흔두 끼를 먹었다는 이야기. 나는 마흔두 번의 식사 동안 뭘 먹었을까? 우선 그중 아침식사에 해당하는 열네 끼 중 열두 끼 정도는 Franprix(이 도시를 돌아다니면 대충 한국의 GS25 슈퍼마켓 정도의 빈도로 등장하는 편의점 비스무리한 마트)의 자체제작 상품으로 나온 Pétales de riz, blé complet et orge nature(구글번역기 왈: 벼 꽃잎, 통밀, 평 보리)라는 시리얼이라고 할 수 있다. 달지 않은 곡물 시리얼이다. 나는 아주 웃기는 식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다이어트 내지는 건강관리를 한답시고 몇 년째 식이요법을 실천해오고 있어서 식품을 고를 때는 영양성분표를 확인해 달거나 짜거나 포화지방이 많지 않은 제품을 고른다거나, 국물 요리는 건더기만 건져먹는 방식으로 저염식을 한다거나, 매일 하루 한 끼는 샐러드를 먹는 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웃기는 건 이 다음 부분인데, 그러면서 과자나 빵이나 아이스크림이나 기타등등 먹고 싶은 간식들을 또 얼마든지 먹는다는 거다. 일명 말짱도루묵 식이요법이라 하겠다. 스스로도 모순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 그냥 습관이 돼서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이 ‘뻬딸 드 히’ 어쩌고 하는 시리얼로 말할 것 같으면 여기 도착한 첫날 처음 간 슈퍼에서 사온 녀석으로, 상술한 바와 같은 습관에 의해 애써 (불어로 된) 영양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해가며 고르고 고른 달지 않은 제품이다. 아침마다 우유 또는 (아주 거센 무가당이어서 거의 종이 맛이 나는) 두유 또는 (무가당이지만 맛있는) 그릭요거트와 함께 먹는다. 그럼 아주 충분하고 만족스러운 아침식사가 된다. 그렇지만 나는 결코 여기서 멈출 수 없다. 프랑스는 맛있고 질 좋은 과일들을 저렴하게 사먹을 수 있기로 유명한 나라다.
프랑스에 관한 여러 로망이 있었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시장이었다. 마트 말고, 정해진 요일에 야외의 정해진 공간에 줄줄이 천막을 치고 열리는 재래식 시장. 운 좋게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도 일주일에 두 번씩 장이 열린다. 각종 식료품들을 매대에 죽 풀어놓고 위에 종류별로 가격을 걸어놓는데, 이런저런 반찬류나 디저트류, 해산물 등등도 있지만 역시 주종목은 채소와 과일이다. 토마토 1킬로에 1.99유로(한화로 약 2733원), 이런 식이다. 한국에서는 과일이나 채소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그마저도 요즘은 새벽배송을 시켜먹는 일이 잦기 때문에 여기서 동전을 짤랑짤랑 주고받으며 상인들의 손을 통해 직접 신선한 과일과 채소를 사는 재미는 도통 포기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이곳에서 지낸 2주 내내 집 냉장고에는 오렌지, 복숭아, 서양 배, 가지, 파프리카 등이 항상 서로 빈자리를 메꿔가며 동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시리얼과 유제품으로 살짝 심심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면 꼭 이런 과일 하나쯤 더 먹어주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나면 놀랍게도 금세 점심시간이 된다.
점심 열네 끼 중 열 끼 가깝게 파스타를 해먹었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파스타는 한국에서의 밥과 같다. 여기도 물론 마트에 몇 종류의 쌀을 팔지만 한국에서 먹던 쌀이 아닐뿐더러 이렇다 할 반찬거리도 없기 때문에 기본적인 탄수화물 섭취는 결국 파스타로 해결하게 된다. 사실 밥을 해먹는 것보다 더 간단하다. 한국에서 한 끼 밥을 차려먹을 때 밥을 짓는 일 외에 함께 먹는 반찬이나 국 등을 조리하는 데 드는 수고를 생각해보면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라면 끓이고 계란 부쳐먹는 일 말고는 생전 요리라는 걸 해먹는 일이 없던 사람이다. 그런 내가 제법 어려움 없이 여기서 파스타를 만들어먹으며 지내고 있다. 두려울 게 없다. 망치면 그냥 내가 맛없게 먹으면 그만이니까. 별로면 다음에 다시 또 해보면 되지. 그래서 그냥, 면을 삶고, 먹고 싶은 채소를 썰고, 적당히 익히고, 소스를 붓는다. 뭘 어떻게 해도 그럴싸하다. 아직까지 딱히 못 먹을 정도로 맛이 없었던 적은 없다. 질리지 않냐고? 한국에서 주식인 밥이 질리는 일은 없듯이, 여기서도 주식인 파스타가 질리는 일은 없을 것 같다. 밥도 다 같은 밥이 아니라 매번 다른 반찬을 차려 먹듯, 파스타에 들어가는 재료나 소스도 그만큼 다양하니까. 때마다 양조절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냥 혼자의 힘인 것 같다. 아무리 많이 만들어도 무조건 다 먹는다. 딱히 남겨서 버린 기억이 없다. 그냥 내가 사온 재료로 내가 음식을 해서 내가 맛있게 먹고 있으면 일단 기분이 좋다. 그러니 남기거나 버릴 일이 없는 것 같다. 찐다. 살 찐다.
이곳에 와서 거의 매일을 밖에 나갔지만, 밖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은 아직까지 거의 없다. 코로나로 인해 매장 내 취식이 계속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케밥이나 햄버거를 사서 길바닥에 앉아 먹거나(정확히는 강변의 둑이나 길가의 벤치나 계단 등지) 빵과 커피를 사서 잔디밭에 앉아 먹는 정도. 그러다 며칠 전부터 테라스에서의 취식만이 제한적으로 가능해졌는데, 두 번 정도 테라스에 앉아 식사를 해봤으나 기분은 좋았어도 솔직히 체할 것 같았다. 아직 이곳 날씨는 제법 춥고, 테라스라는 게 정확히는 보행자들이 다니는 길목이기 때문에 식사하는 내 코앞을 사람들이 계속 왔다갔다하고, 제한이 풀려 신난 시민들이 너무 바글바글해서 신경이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영혼의 단짝인 룸메이트와 함께 딱 한번 바스티유 역의 번화한 거리에 있는 어느 이태리 음식점 테라스 자리에서 와인을 곁들인 포카치아를 먹은 후로, 우린 그냥 아시안 마트에서 재료를 한가득 사와서는 집에서 마라탕이나 끓여먹었다. 2주를 통틀어 단연 최고의 식사였다. 왜인지 한국에서 마라탕은 주로 식당에서 먹는 음식인데, 여긴 훠궈 집은 많아도 마라탕 집은 따로 찾기가 힘들다. 그래서 대체로 재료를 사다가 집에서 라면 끓이듯 간단히 끓여서 먹는다. 그리고 그게... 기가 막히게 맛있다. 나는 마라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한국의 지극히 한국화된, 그저 육개장 맛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짭마라탕'(내 표현이다)을 굉장히 싫어하는데, 알싸한 냄새부터 각이 다른 진짜배기 마라탕을 이렇게 마음껏 집에서 끓여먹을 수 있다니, 진심으로 감동이었다. 프랑스 와서 먹는 프랑스 음식 어떠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뭐 한국에서 매일 불고기 비빔밥만 먹는 거 아니듯이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오늘 점심은 짜파구리 끓여먹었다.
출국 전에는 출국을 앞두고 처리해야 했던 이런저런 일들이 주는 스트레스 때문에 계속 과식이 이어졌었고, 여기 도착한 후로는 또 여기대로 신이 나서 폭주하는 과식대행진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족히 일주일에 반 이상은 하루 만 보씩을 걷고 매일 30분씩 운동을 하지만 그래도 소화가 잘 안 된다. 쉴 틈을 주지 않고 먹으니까. 매일 생각한다. 내가 왜 이렇게 많이 먹는지에 대해. 단지 맛있는 게 많아서? 스트레스 받아서? 그냥 습관이 돼서? 아마 다 맞는 이유일 것이다. 근데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아직까지 ‘관광객 모드가 풀리지 않아서’라고 생각한다. 이런 거 한국 가면 없잖아, 싶은 것들은 꼭 먹어 보고 사진도 찍어놔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언제쯤 이곳의 일상이 진짜 내 일상이 될까. 그때가 되면 더 이상 파리의 거리가 신비로울 만큼 아름답지 않고, 다양한 먹거리들이 궁금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팔이 아프도록 사진을 찍지도, 하루종일 느낀 바를 새벽에 글로 적으며 즐거워하지도 않을까? 그런 날이 오게 되면, 나는 또다시 새로운 곳으로 떠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