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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02. 파리가 아름답다는 건 환상도, 낭만도 아니다

2021년 5월, 파리 시간으로 19일 03시 26분



  아름다운 도시 파리. 파리가 아름답다는 건 환상도, 낭만도 아니다. 이 도시에 대한 내 첫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이 도시가 아름답다는 건 단지 팩트구나.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만큼이나 일반적인 사실. 물론 변덕스러운 날씨, 느린 행정처리, 낡고 지저분한 골목과 지하철, 인종차별 등등의 요소가 모두 ‘이 도시’의 일부인데 그것들마저 전부 아름다운 것이냐고 하면 이야기가 길어지겠지. 다만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도시의 아름다움 역시 변함없이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 거짓말 같은 도시 속에서 홀로 작아진 채 저 잿빛 하늘보다도 더 퀴퀴한 마음으로 구정물을 뚝뚝 흘리다가도 그저, 파리 어느 곳이든 걷기만 하면, 그 어느 귀퉁이를 바라보기만 하면, 모든 게 용서되어버리는 그 미적인 치사함.


  파리에 잠시 다녀온 적이 있거나 얼마간 그곳에 머물렀거나 혹은 그보다 긴 시간을 그 도시에서 지낸 바 있는 누군가가, 문득 예술에 관해 아는 척을 하면 부디 재수가 없어도 용서하길. 진부한 표현이지만 도시 전체가 예술인 이곳에서는 그저 자고 일어나고 끼니를 때우고 이동하고 대화하는 모든 생활이 다 작품의 감상이며 창작이 된다. 파리를 가득 메운 오래된 건물의 건축 양식들이 제각기 어떤 의미와 배경을 갖는지 설명할 수 있는 지식과 재주가 내겐 없지만, 죽을 때까지 질리지도 않고 그 모든 디테일마다 입을 헤 벌리며 감탄하고 놀라고 사진을 찍어댈 순수한 감각만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도시는 대체, 왜 이렇게까지 힘써 아름다울까? 한국으로 따지면 다이소 올리브영 이마트에브리데이 같은 그저 흔한 상가들이 입점해있는 건물마다 세상 정교하고 화려한 성채마냥 시끌벅적한 것만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그 한켠을 지독하게 메우고 있는 온갖 낙서들은 혹시 ‘뱅크시자격증’ 같은 게 집단으로 발부라도 되는 건가 싶게 하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다양한 이들의 근사한 옷차림, 패셔너블한 감각에 눈을 빼앗기다 보면 도무지 길을 걸어갈 수가 없을 지경이다.


  유유상종의 철학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대한민국 서울이 이토록 빠르고 편리한 도시가 된 것만큼(그곳은 정말, 정말이지 눈이 부시게 빠르고 편리해서 프랑스에 와있는 지금의 내겐 마치 미래도시처럼 느껴진다) 프랑스 파리가 이처럼 아름다움에 통째로 삼켜진 도시가 된 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머리를 자르고, 누군가는 옷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릇을 닦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는 세상이듯, 세상의 어떤 도시는 아름다움을 담당하는 거지. 그렇다면 이 아름다움에 미쳐버린 도시 속에서 나는 무엇을 담당하면 좋을까. 나도 같이 미쳐버린 건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그걸 고민하고 있는 일 자체로 왠지 충분하게 느껴진다. 마치 이 도시가, 이 도시의 명백한 아름다움이, 나를 둘러싸고 영원히 먹여살릴 것만 같다. 그럴 리가 없는데. 먹여살리기는커녕 비자가 만료되는 순간 나를 부리나케 걷어찰 텐데. 뭐, 그럼 나는 울면서 도망쳐야지. 우주정거장 같은 지하철역이 있는 도시로, 자기 전에 쿠션 파운데이션을 주문하면 기상 전에 집 현관 앞에 도착하는 도시로. 이제 지폐나 동전은 줘도 안 받는 깔끔하기 짝이 없는 그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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