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5m: 엄마가 이렇게 낳아줬잖아요

Chapter 2.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기 시작 2014-2019

by Luci

2015년은 특별한 이슈가 없이 지나가서인지 일기장에 남은 것이 없다.

교육대학원에 지원했다가 떨어져서 실망한 이야기라도 있을 것 같은데 크게 아쉬움이 없었나.

2016년부터는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해서 저녁때 일을 마치고 수업을 들으러 가는 바쁜 나날들을 보냈다.


2016년 5월 3일과 4일 사이

또다시 봄이다. 여느 해처럼 다시 학교에서의 일상이 시작되었고, 3월과 4월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왔다. 대학원을 핑계로 일주일에 이틀을 바삐 보내는 사이 무언가가 쌓이기도 하고 빠져나가기도 한다.
인간의 복잡한 마음과 정신병 혹은 심리를 열심히 연구한 학자들과 교수님의 수업,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덕분에 조금씩 그 어렵던 관계와 마음에 대한 질문들이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진리를 깨닫는다고 해도 그것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 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에겐 분명히 자극이 되고 변화는 일어날 것이다.
과거의 경험과 삶의 궤적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현재의 삶이 미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에, 결국 미래를 바꾼다는 것은 과거에 묻혀있는 나를 파헤치고 현재에서 유의미한 노력을 계속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신중하게 몰입하며 여드름을 짜다가 나의 대인관계 패턴에 대해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다고 여기는 문제에 대해 줄곧 나는 회피하며 직접 맞닥뜨려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 왔음을 떠올렸다. (왜 하필 여드름 짜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를 그대로 보기보다는 축소시키거나 숨김으로써 없어지기를,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사라질 거라고 그렇게 여기며 불안을 달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그게 나의 방어기제였음을, 너무도 유치하고 미성숙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 사실은 낯설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큰 소리로 싸우고 있을 때 방구석에 틀어박혀 숨죽여 울며 혼자 공상에 빠지곤 했던 과거의 ‘나’는 그저 과거 속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 속 어딘가에 침잠해 있으면서 조용히 현재를 좀먹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팠다. 단지 대인관계에 그치지 않고 삶 속에서 계속 마수를 뻗치고 있었던 것만 같다.
나이 서른에 ‘나’라는 사람의 면면을 다시 새삼스럽게 발견하며, 때로는 부끄러움과 창피함, 수치심과 열등감을, 가끔은 뿌듯함과 기쁨을 느끼게 되는 것에 감사하다. 아직 알아내지 못한 나의 무의식과 잠재된 ‘자기’ 모습에 대해 궁금한 마음도 들고. (어떨 때는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겠다 싶기도 하지만)
결국 삶은 나 혼자만의 투쟁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는 것은 타인과의 만남 사이에서 어그러진 나의 자아가 다른 사람에게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뒤늦게 후회하며 수습하려 애쓰는 과정의 연속이란 생각을 한다.
부족하고 부끄러운 ‘나’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를 내가 버릴 수 없기에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수밖에 없다. 그게 내가 성숙해지는 방법이라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조금씩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찾아가는 일이 덜 두렵다. ‘나’를 마주하는 일이 조금씩 기쁨이 되어간다.


2016년 8월 7일과 8일 사이

사람이 태어나서 죽기까지 겪는 수많은 일 중에 큰 관문 같은 일이 있다고 했다. 태어나서 1년, 20살 성년, 결혼, 죽음을 맞이하는 일까지 모두가 겪는 일이라고 하여 ‘통과의례’라고 불리었던 일. 하지만 현재에도 그건 당연한 일일까. 생사는 그렇다 쳐도 20살이 지나서 결혼하는 일까지 당연한 걸까. 나이가 차도 독립된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고, 결혼도 선택이 되어가는 시대인데. 여전히 나는 독립하지도 못하고, 결혼도 유보한 상태인데 사실 두 가지는 모호하다. ‘어른’이 된다는 것과 ‘결혼’이라는 것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에서 나는 이렇다 할 결론에 이르지 못했다.

(만으로 서른 살에 가까워진 이때쯤 우리 엄마의 목표는 내가 얼른 결혼하는 것이었다. 딱히 만나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걸 마치고 결혼하면 좋겠다. 솔직히는 결혼을 할지 말지도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솔직한 나의 생각을 엄마에게 - 나는 엄마니까 당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했을 뿐인데 - 하고 나서 오히려 마음은 더 무거워졌고 더 힘들었다. 엄마는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고 내가 그 결론에 맞춰서 따르기를 바랐을 뿐, 그 외의 답변에 대해 검토 내지는 수용한다는 선택사항은 전혀 없었다. 하나의 선택지와 하나의 길 만이 존재할 뿐, 나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없었다. 엄마에게 내 생각은 받아들일 수 없는 답안이고, 따라서 그것은 어떻게든 수정되어야 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일인 것이었다. 결혼이 옵션이라면, 쌍꺼풀 수술(엄마에게는 결혼의 전제 조건이다)을 하지 않는다면 엄마에게는 딸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는 것이고 딸일 필요도 없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 된다는 논리였다.

(대학생 때 인공 치아 시술받은 것 외에 두 번째 엄마의 목표는 내가 쌍꺼풀 수술을 받는 것이었다. 이유는 내가 눈이 작아서도 아니고 엄마가 보기에 눈이 처졌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 눈꼬리가 더 처지니 지금 쌍꺼풀 수술을 해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 좋다고 엄청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했으나 두 번 속을 내가 아니었다. 차라리 심한 여드름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비싼 박피술 같은 것을 받아보자 했으면 슬그머니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외모에 있어 우리는 서로 바라보는 곳이 너무도 달랐다. 그렇게 다른 만큼 서로의 말이 맞다고 우기며 오지게도 싸웠다. 이 일기를 쓴 날도 그런 ‘피 터지는’ 싸움 중에 하나를 겪은 날이었을 것이다.)

순간 나는 어이가 없었고 헛웃음이 나왔지만, 곱씹어 생각하니 기가 막히고 내 존재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나를 낳은 사람이 나를 부정하고 있는데,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 존재해야 할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문득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상상을 하고, 손목을 그어 정맥을 끊고 피범벅이 된 모습을 그려보았다. 끔찍한 일이었다.
죽는 것은 너무 극단적이니, 그래도 살아야 할 궁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전처럼 엄마가 말하는 대로 고분고분시키는 대로 따르며 살아야 하는 걸까. 나는 엄마 딸이니까 엄마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엄마가 겪어온 역사와 고통과 어려움을 이해한다고 해도, 그 안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자신을 갉아먹는 모습까지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평생을 피해의식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부모 복도 없고, 형제 복도 없고, 인복도 없고, 운이란 운은 지지리도 없다고 한탄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스스로가 변화의 의지가 없는데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 봐야 ‘소귀에 경 읽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전에도 엄마에게 솔직한 얘길 해봐야 소용없다고 깨달은 뒤에도 같은 짓을 반복한 것이 어리석은 일이었음을... 내 속마음을 터놓은 뒤에야 떠올렸다. 자기 생각과 편협한 신념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엄마라는 걸 내가 잠시 잊고 있었다. 엄마의 세계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수용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몇 시간을 분노와 증오와 후회와 슬픔으로 울며 보낸 뒤
에야 이런 일이 덧없는 일임을 깨달았다. 나의 엄마에겐 자신만의 ‘성’이 너무도 견고하고 높게, 굳건히 서 있어서 절대 바뀌지도 흔들리지도, 변하지도 않는 것임을 이제야 알았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고 엄마라는 존재를 그대로 수용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막막하다고 생각만 하던 일을 저지르고 나니, 내 안에서 상상만 하던 일을 직면하고 나니 깨닫게 되는 바는 많았다. 내가 그토록 독립하고 싶었던 이유는 내가 엄마의 요구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된 뒤에도 온전한 독립은 아니었고, 엄마와 난 어떻게든 엮여 있으면서 불완전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본래의 내 모습 자체가 수용되지 못하며, 무엇이든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자리 잡았을 것이고 그래서 우울감도 커졌을 것이다.
그래도 나 혼자 이만큼 온 것도 많이 왔다고 생각한다. Justin Bieber의 ‘Love yourself’라는 노래 제목처럼 나는 이제 조금 내 자신을 자각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버텨왔고 노력해 왔던 만큼 자란 것도 있다. 이만하면 괜찮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이걸 깨닫기까지 30년이 걸렸다.
그날이 오늘인 것 같다.

*나의 엄마 이야기

우리 엄마 성격은 매우 내향적인데 의외로 여기저기 다니는 걸 좋아하고, 어디 좋다는 데 있으면 한 번쯤 가보려고 하지만, 너무 사람 많은 데는 또 싫어합니다.

도시보다는 자연이 아름다운 곳을 선호하는 편입니다.

엄마의 말로는 공부를 못하지는 않았는데, 강원도 시골에 농사짓는 집안의 8남매 중 일곱째라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학업은 중학교까지만 집에서 지원해 주셨답니다. 고등학교는 본인의 힘으로 다녀야 했는데, 멀리 마산까지 가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죠.

그런 걸 보면 큰 용기와 어마어마한 근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엄마와 함께 마산에 가서 엄마가 졸업했던 학교도 가본 일이 있었는데, 아련한 옛 기억을 떠올리는 엄마의 눈동자가 조금 촉촉했던 것도 같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의 어느 산부인과에서 (아마도) 간호조무사로 일하다가 혼기가 되어서 몇 번의 선을 보고 그러다 아빠를 만나서 결혼했는데,

과연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본인만 알겠지요?

(전에 선을 본 사람 중에 서울에서 지금의 서울교통공사(?)쯤 되는 곳에서 일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아무래도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퇴짜를 놓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분과 결혼했으면 사는 건 더 편했겠다 한 걸 보면... 아빠와 결혼한 걸 조금은 후회했을지도?)

엄마나 아빠 둘 다 부모님께 받은 것 없이도 둘이 열심히 벌어서 자그마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가며 딸 하나, 아들 하나를 키웠는데 나름 치열한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엄마에겐 치명적인 ‘시댁 스트레스’, 아빠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잦은 다툼 때문에, 때로는 설움에 잠기기도 하고 자기 운명을 탓하기도 하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소연을 듣는 사람은 당연히(?) K-장녀인 저였고 엄마의 슬픈 운명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같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제 나이도 서른 즈음되니 엄마에게 공감하는 날보다는 지겨워하던 날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엄마의 ‘팔자타령’에 지치다 보니,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말 그대로 ‘지지고 볶는’ 모습을 많이 보다 보니 결혼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도 하게 된 것 같고요.

하지만 엄마는 달랐습니다.

엄마에겐 당신 인생의 큰 과업 중 하나가 딸내미 결혼시키는 것이었는데 거기에 ‘나 결혼 따위는 안 하렵니다!’ 하고 외쳤으니 기함할 노릇이었겠지요.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격이었으려나요.

돌이켜보면 이건 엄마와의 본격적인 ‘결혼 논쟁’의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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