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기 시작 2014-2019
2016. 11. 14. Supermoon이 뜬 밤에
쓰레기를 버리고 운동을 하러 나왔다가, 아파트에 가려 조각난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찾았다. 건물 사이로 너무나 환하게 뜬, 말 그대로 거대한 달이었다. 저렇게 환한 달을 도시에서 거의 본 일이 없는 것 같은데, 가로등 불빛보다 더 밝은 것 같은 달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흐릿하고 희뿌연 빛이 아니라 정말 찬란하게도 빛나고 있었다.
문득 인도의 푸쉬카르의 어느 사막에서 비박(Biwak)을 하며 느꼈던 것들이 떠올랐다. 인공적인 빛이라곤 핸드폰의 빛과 타들어 가는 장작이 내는 빛이 전부였는데, 그 빛의 밝기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하늘에서 그날에도 보름달이 엄청난 밝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달빛이 원래 이렇게 환한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그 빛에 의지해서 길을 찾아갈 정도였다. (사막이라 따로 화장실이 없어서 자연스레 언덕 너머 누가 보지 않을 것 같다 확신이 드는 적당한 곳이면 화장실이 되었다. 그 ‘지점’을 찾아가는 데는 달빛이면 충분했다) 너무 환해서 해로 착각할 만큼 밝고도 밝았다.
빛은 어둠을 물리치고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는다.
때로는 사람의 생에 뭔가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들이 쌓여있을 때 그 상태를 어둠에 비유하곤 한다. 이상하게도 주말인 일요일부터 흐릿했던 날씨 탓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나는 해결하지 않은 몇몇 일들 때문에 스스로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하기 싫다는 핑계로 미루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일요일에는 그 모든 것이 부담으로 작용하면서 짓눌렸던 것이다. 해법은 매우 간단한데, 그냥 하면 된다. 어느 스포츠 브랜드의 슬로건처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토요일에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떠들어댔던 말 중에 내가 나를 너무 추켜세우며 말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 어떤 상황에 대해 공감보다는 판단을 앞세웠던 것 같다. 공감에 대한 부분은 오늘 학부모 상담 때도 느껴졌다. 이야기하고 보니 그 어머니는 상대 어머니가 잘못했고 사과도 받았지만, 벌어진 사건 자체에 대해 감정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그 부분에 내가 전적으로 공감해 주길 바랐던 것 같은데, 순간순간 내가 뭔가 초점을 잡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그런 점을 깨닫고 나면 뭔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지는 기분이다. 남들에게 손가락질받을 때의 부끄러움이나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들켰을 때의 기분처럼.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정신적 에너지를 이루는 것 중에 자존감이나 자아개념은 수십 년간, 살아온 시간만큼 계속 쌓이며 단단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란 존재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임을 수업을 듣고 나서 비로소 깨달은 느낌이었다.
오늘을 살면서 또 하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이런 점이 있다고. 그게 나를 나답게 하는 부분이라고, 조금은 부끄럽지만 내보일 수 있을 것 같다.
2017년 가을은 유독 정신없던 시기였다.
전해에 이어서 2학년을 맡았는데 처음 맡는 저학년이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던 작년 아이들과는 달리,
2017년의 2학년 우리 반 아이들은 거칠고 사나워서 다투는 일이 다반사라 싸움을 말리다 보면 하루가 짧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아이들 문제에 예민하고 드세며 유난스러운 학부모들 때문에도 힘들었다.
어린아이답지 않은 사건 사고들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했고, 그걸 수습하느라 골머리를 앓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학교 일과가 끝나면 대학원 수업도 있었으니,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하루하루 허덕대며 살았던 것 같다.
제일 큰 문제는 엄마와의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우울함이 흐르는 강물처럼 여기저기서 만난 물줄기들이 합쳐져서 점점 커지고 있는 꼴이라면,
그 우울의 강에서 하나의 큰 물줄기는 엄마와의 관계가 악화된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렇게 관계가 나빠진 건 나의 연애 때문이었다.
엄마의 목표는 꽤 오래전부터 (내 생각엔 아마도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나를 결혼시키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지인의 자제들이 결혼한 이야기, 주변 사람들이 ‘그 집 딸내미는 결혼 안 하냐?’고 묻는 이야기 등을 시시콜콜 나에게 했었고
나는 알고도 모른 체하는 전략으로 맞서는 상황이었다.
이른바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기’ 전략이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빨리 시집가라’는 소리를 돌림노래로 들었던 덕분인지 셀프 소개팅이란 것에 나가게 되었는데,
운 좋게도 호감 가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과 좋은 감정으로 두 달 정도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불현듯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 (참으로 바보 같은) 날이 있었다.
엄마: 그래? 그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인데?
나: 마케팅 관련된 일을 한대.
엄마: 마케팅? 회사 이름이 뭔데?
나: 잘 모르겠어. 큰 회사는 아니고 자기가 운영하는 회사라고 하더라고.
엄마: 뭐야, 그럼 사업하는 사람이야? 사업하는 사람은 안 돼. 그 사람 너 이용해 먹으려고 만나는 거 아니야?
나: 엄마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사실 그 사람 대학교 다니다가 군대 가서 마케팅 쪽 공부를 했는데 재밌고 더 잘해보고 싶어서 대학도 그만. 두고 열심히 지금까지 일해서 기반을 잡았다고 하더라고. 자기 일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서 괜찮은 사람 같고 아빠 같지 않게 엄청 다정해. 집도 잠실이고 경제적으. 로 어려운 것 같진 않던데. 아버지는 사업하신다고 하고.
엄마: 뭐?!!!! 무슨 대학도 안 나온 사람이랑 만나고 있어!!!! 당장 헤어져!!! 너 미쳤니?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모자란 놈이나 만나고 다니고,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휴 속 터져, 이 #$%&^&#야!
나: 엄마는 사람도 안 보고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 그리고 내가 뭐 그 사람이랑 결혼을 한다고 하길 했어, 뭘 했어! 내가 왜 엄마한테 그런 욕까지 들어야 하는데! 됐어, 이 얘기 그만해.
엄마: 야, 너 그놈이랑 당장 헤어져! 내가 너 제대로 하는지 쫓아가서 확인하기 전에! 아휴, 내가 동네 창피해서 정말!!! 내 말 알아들어?!
그래서 정말 바보 같은 나는 그 사람과 헤어졌고, 그러면 엄마와의 진흙탕 싸움도 끝날 줄 알았다.
나는 착하고 엄마 말이라면 거역 못하는 그런 순종적인 딸이었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보다는 엄마를 택했던 것이다. 그만큼 내게 엄마는 중요한 존재였다.
지금도 그 사람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련해지고, ‘만약에 헤어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에 빠지기도 하지만,
난 엄마가 반대하는 사랑을 고집할 만큼 용기가 없었고 그땐 지금보다 더 유약한 사람이었으니 엄마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모든 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 믿으며.
엄마: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엄마는 같은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기적으로 여러 번 반복해서 말하는 데 선수였다.),
여태껏 고생고생해서 키워놨더니 어디서 ㅂㅅ같은 짓이나 하고 있고....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어? 그렇게 키웠어??
나: 엄마가 하라는 대로 헤어졌다는데 왜 욕까지 하고 난리야? 제발 그만 좀 해.
엄마: 내가 너 때문에 속병이 나서 요즘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아 아주. 너 그렇게 네 마음대로 할 거면 호적 파고 당장 나가.
그리고 내가 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거 돈으로 보상해. 너 나한테 3억 가져오고 호적 파서 나가 살아.
나: ....
(너무도 당황해서 잠시 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 나를 키우는 데에 경제적으로 얼마나 투입이 되었을까를 대충
빠르게 계산해 보니 3억은 말이 안 되는 금액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어떻게 엄마가 돼서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어?
그리고 나 키우는데 무슨 3억이나 들어?
학원도 별로 안 다니고, 사교육이라고 해봐야 중학교 때 영어학원 몇 달 다니고
고등학교 때 수학 과외 잠깐 받은 게 다인데 무슨 3억이야.
억지도 적당히 부려야지.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렇게 한바탕 싸우고 나서도 서로 분이 풀리지 않아서 전화로도 싸우고, 문자로도 싸웠다.
그즈음 사촌 언니 결혼식이 있어서 갔다가 엄마 얼굴을 보니 또 열이 나서 울고, 피로연장에서 식사하며 오고 간 설전에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울다가
결국 밥도 제대로 안 먹은 채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집에 갔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는 한동안 사랑의 열병을 앓았던 것 같고, 엄마는 갱년기가 한창이었던 것 같다.
물론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에서야 얼핏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땐 내 마음이 너무 아팠고 그걸 모르는 엄마가 끔찍하게 미웠으며,
엄마의 말과 행동과 모든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괴로웠고, 혼자 남겨진 쓸쓸함에 치를 떨던 시간이었다.
한참을 싸우고 얼마간 냉전기를 갖던 중,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엄마와 외할머니는 애틋한 사이가 아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엄마는 담담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사실 엄마는 외할머니에게 섭섭한 마음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외할머니의 양육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 그리고 엄마와의 성격 차이로 인한 마음의 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마음이 멀리 있으니 몸도 자연스레 가까워지지 못했는데,
명절이면 다들 가는 외갓집도 엄마가 하도 가기 싫다 난리를 쳐서 내 기억으로도 외가에 갔던 일이 손에 꼽힐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이상하게 친할머니보다는 외할머니에게 더 따뜻함을 느꼈는데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그냥 엄마 쪽이면 더 포근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나 보다.
그 마음 때문인지 엄마의 그 모나고 뾰족한 말들 때문에 상처 입었던 일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내가 잘못했다고 하며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차게 식었던 엄마와 나의 사이가 조금은 나아져서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 있었다.
서로 떨어져 살면서도 엄마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자잘한 심부름들 - 무릇 K-장녀라면 누구나 해봤을 작은 일들: 주로 인터넷으로 물건 주문하기(A.K.A. 구매대행),
엄마의 동창회 관련 문자 전송, 동창회 총무를 맡은 엄마의 회계 업무 대행 등등 - 을 재개했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집에 아들내미도 있는데 이런 일들은 왜 거의 주로 떨어져 사는 나에게만 부탁했을까(그때는 나에게 시킨다고 생각했다).
그게 엄마의 애정 표현이었을까.
고등학교에서 급식 조리실무사로 일했던 엄마는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잔반을 치우고, 식판을 닦고, 청소하는 일을 했다.
힘든 일이지만(나는 이 직업을 3D-Dirty, Dangerous, Difficult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청소년의 입맛은 얼마나 까다로운가!
그 입맛을 맞춰 급식을 만든다는 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만든 음식이 다들 맛있다고 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함께 일하시는 분들과 크고 작은 다툼이 빈번했고, 속앓이를 했고, 나에게 푸념과 하소연도 많이 했다.
언젠가는 내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인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그 속풀이를 할 사람이 나여야 했던 것도, 엄마가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었을까.
한참 시간이 지나고 상담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랑도 대물림되는 것 같다고.
엄마가 엄마의 엄마로부터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며 일찍 웃자란 어른이 되고 ‘엄마’가 되어서 나를 열심히 키웠지만,
사랑을 어떻게 주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해선지 나도 그 설익어 꺼끌 거리는 사랑을 물려받은 것 같다는 걸.
모자라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세습되는 건가 보다 생각했다.
좋은 성품이나 넉넉한 살림이 아니라, 부족한 사랑도 대를 이어 계속되는구나.
세대가 거듭되는 사랑의 결핍이라니, 떠올리면 씁쓸하다 못해 울컥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