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8m: 견뎌 보겠습니다.

Chapter 2.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기 시작 2014-2019

by Luci

2017년, 일기장에 메모 같은 흔적을 남겼을 때는 한창 가을이었다.

스마트폰 앨범을 훑어보니 그래도 이때에 처음 10km 마라톤도 뛰고, 산에도 올랐었다.

약 덕분일까. 다행이었다.


2018년 1월 30일쯤부터 열흘 동안 태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나 혼자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논문 주제도 확정하지 못했지만,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에 교수님께 죄송하다고 싹싹 빌고 도피하듯 떠난 길이었다.

사진만 보면 우울한 사람의 티가 나지 않아서, 진짜 여행이 좋긴 했나 보다 싶다.

2018. 2. 18.

방학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을 안 하니 참 좋다. 낮잠도 잤다. 날이 춥다는 핑계로 집에 있으니 빈둥거리며 팔자가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그러나 아직도 병원 가는 건 적응이 안 된다. 내 생각보다 우울의 깊이가 깊은가 보다. 일주일 쉬는 것으론 어림도 없고 한 1년쯤 아무 생각 없이 지내면 좀 나으려나. 항우울제는 여전해서 좀실망했다. 나를 좀먹는 생각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참 놀랍다. 그리고 지금의 이 생각이 꼬박 1년 반 전에도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그래도 병원에 가서 다행이라 생각해야겠지. 욱하는 마음에 정말 일을 저질렀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나를 보듬어주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라니. 끊임없는 자기부정으로 내 존재가 바스러질 때가 되어서야 나는 모든 부정을 멈출 때가 되었다고 깨닫게 되었나 보다. 하도 울었더니 코가 또 막혔다.
오직 왜곡된 환상만이 우리를 구원한다.2)
환상은 달콤하게 감각을 마비시키고 순식간에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게도 한다. 그것으로 우리는 구원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환상이 환상이라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 누군가는 좌절하고 무너져 내린다. 꽉 막힌 세면대를 보면서 시원하게 더러운 물이 흘러 내려가는 환상을 떠올리면 잠깐은 즐겁지만 곧 깨어나면 맥없이 답답해지는 것처럼.
화장실 세면대 하수구가 꽉 막혀 물이 좀처럼 빠져나가질 못했다. 하수구를 뚫어주는 액체를 부어도 소용없었다. 며칠 안 된 것 같은데 금세 막혔다. 결국은 내가 싫어하는 그 도구를 다이소에서 천 원에 샀다. 가느다란 플라스틱 줄 같은 것을 하수구에 집어넣었다. 잡아 빼면 오물이나 머리카락이 딸려 올라오는 그것. 낑낑대며 하수구에 도구를 욱여넣으니 잘 안된다. 덮개를 열어 다시 넣어보니 비누 조각 같은 것이 있었나 보다. 몇 번 넣었다 빼니 비누 조각은 쑥 빠지고 거짓말처럼 물이 잘 내려갔다. 그 독한 액체를 다시 부었다 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같은 염기성이니까. 오히려 직접 뚫어버리는 것이 훨씬 쉽고 간단한 것을. 그랬다. 나는 삽질을 참 잘한다. 돌아가는 것도 잘한다.
환상이 우리를 구원하는 이유는 인간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한낱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믿음이나 기대,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라고.

2) 괴테의 문장이라고 하는데, 어디서 보고 쓴 것인지 모르겠다...
2018.2.23.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가끔씩 만나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며, 그동안 전하지 못했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지는 때가 있다. 지금 내가 이고 지고 사는 짐들을 그네들에게 떠넘기려 했던 것은 아닌데 속절없이 눈물을 보여 괜한 부담을 준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꾸 내 뒷모습이 궁금해진다.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았을 그네들의 눈빛이 어땠을까 생각한다.
애써 가렸던 슬픔이 비가 되어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추측하건대 별 뜻 없었던 상대의 말속에서 내가 ‘비난’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찾아내고, 공감받으며 위로받지 못했다는 서러움에 복받쳐 울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에는 습기 찬 눈이 내려 곳곳에 쌓였다. 떨어지던 물방울이 찬 바람에 얼어붙어 여기저기 흩어져 내렸다.
말이란 때로는 얼마나 우스운지 사람의 마음을 순간 뒤흔들어 난장판으로 만들었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상황도, 맥락도, 말을 뱉은 사람의 마음도 자취를 감추고 끊어진 몇 개의 낱말들만 재처럼 변해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흩뿌려졌다. 걱정되는 마음에, 안타까움을 담아 꺼냈을 그 말이 나에게는 폐부를 찌르는 것처럼 아팠고 어마어마하게 고통스러웠다. 웃으면서 장난이라고 날린 주먹 몇 대에 피를 철철 흘리며 뻗어버린 모습으로, 해질 대로 해져서 낡을 대로 낡아 쓰임새조차 알아보기 힘든 넝마주이처럼 변한 나는 다시 무기력해졌다. 그리고 반박하지 못했다. 그만하라고, 그 말은 너무 아팠다고 말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 앉아 그냥 몇 방울의 눈물을 더 흘렸으면 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간밤에는 역시 사나운 잠자리가 이어졌다. 뜻 모를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 와서 쉬이 쉼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우울을 너무 가벼이 여겼나 보다. 슬픔은 예상보다 훨씬 힘이 세다. 그래서 마를 새 없는 눈가를 단속하며, 답보 상태를 거듭하는 내 자신이 답답하더라도 천천히 나를 다독이며 가야 한다는, 꿈은 그런 뜻인가 보다.

이 일기는 아마도 본가가 있는 고향에 내려갔다가 지인을 만나고 혼자 진득한 상처를 받았던 날에 쓴 것 같다.

그때는 슬퍼서 쓴 글이겠지만, 다시 보니 아마도 우울증 때문에 인지 왜곡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고등학생 때나 어쩌면 대학생 때도 가벼운 우울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의 우울은 내 기질을 다소 차분하게 하고 책이나 영화나 생각에 빠지게 해서 나의 지적 능력을 키우는 생활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이때의 극심한 우울증은 원래도 그저 그런 수준인 나의 인지기능을 더 떨어뜨리곤 했던 것 같다.

어떤 일을 깜빡하거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맥락을 잘못 파악하는 등의 크고 작은 일들을 겪게 했는데

문제는 그런 행동이 나의 잘못임을 자각하고 나면 안 그래도 깨알같이 작아진 자존감이 더 작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었다.


우울증은 참 지독한 병이다.

내가 나를 못살게 군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이 도와주려고 손을 내밀어도 그것조차 뿌리치며, 오히려 상대방이 나를 아프게 찔렀다고 적반하장이 된다는 점에서.

2018. 2. 25.

이 일기장에 글을 적어 끝맺음을 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문득 떠오른 어떤 생각이나 조각난 기억들을 천천히 되짚어가며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기도 하고, 그냥 자조적인 줄글로 이어 보기도 했다. 인간에게는 말하고 싶은 욕구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있는지, 케케묵은 감정의 덩어리를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털어놓거나 그냥 공책에 끄적여 보는 것만으로도 괜히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내뱉은 말들이 헛되고 하찮고 쓸데없고 부질없는, 가끔은 그래서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막힌 하수구가 뚫렸을 때의 짜릿함을 주는 그런 기분이랄까.
사람의 마음이란 참 복잡한 연구 대상이다. 통제도 어렵고, 추론이 번번이 빗나가기도 한다. 본인이 스스로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살피지 않으면 때로는 병이 들고 끝끝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런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의 마음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으로 어설픈 공부를 시작하고 나니, 어떤 부분은 명확해졌고 어떤 부분은 더 미궁 속에 빠진 것 같다.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심리검사를 통해 숫자로 나타내고 설명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 숫자와 설명이 언제쯤 얼마나 적응적인 수준으로 변화할지 장담할 수 없다. ‘적응적’이라는 말 자체도 얼마나 모호한지.
일을 쉬면 나의 우울과 강박의 정도가 나아질 거라는 기대도 그렇다. 일부 좋아진 부분도 있고, 아직 더 노력해야 할 부분도 있다. 그렇기에 한동안 약은 더 먹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조금 더 울어야 할 것 같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할 수 있는 순간이 오면, 그때는 괜찮을 것 같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정상인지 아닌지 묻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될 때쯤이면 나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속의 인물들을 보며 나의 억울함과 아픔을 그들과 견주어보고 숨죽인 채 훌쩍이지 않을 때면 약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 아직은 내가 나를 보살펴야 할 시간임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할 것 같다.

2018년 1학기는 대학원 마지막 학기라는 구실로 학교에서 교과전담 자리를 받아냈다.

과학 수업만 하는 것이라 부담이 적어서 좋았고 담임에서 해방된 것이 기뻤다.

비록 석사 논문은 변인 설정을 잘못한 탓에 아무리 통계분석을 돌려도 내가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아 그야말로 난항에 빠졌지만,

어떻게든 뭔가 유의미한 결론을 얻어보겠다고 밤새 대학교 도서관에서 기를 쓰며 통계 프로그램과 씨름해도 괴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일, 그보다 수십, 수백 배는 더 어려운 학부모를 상대하는 일보다는

결론이 안 날 것 같은 논문을 쓰는 것이 훨씬 나았던 것 같다.

몇 년을 반복해서 하는 일인데도, 그 일을 해서 밥 먹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금도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것은 어렵다.

나의 우울은 여러 이유 - 엄마와의 불안정한 애착과 그로 인한 문제, 낮은 자존감, 소심한 기질 등등 - 로 발현되었겠지만,

그 우울감이 점점 커져 우울증 진단에까지 이르게 한 것의 큰 몫은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 일을 잘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나는 자기만족이 중요한 사람인데 그만큼 타인으로부터의 인정도 중요한 사람이고 ‘잘해야 한다’라는 강박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열심히 애써도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욕받이가 되는 게 일상이니 우울증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2018.4.8(일).

외로움, 허전함, 그리움, 따스함, 부드러움, 달콤함
무언가를 꼭 안고 있을 때 느껴지는 편안함과 아늑함
여유로움 속에서 느끼는 나른함과 불안함
이게 쓸쓸함인가?
아주 만족스러운 와중에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느낌
봄이라서 봄 타나 보다-
이렇게 몸이 봄에 반응하는 건가 보다-
스프링처럼 늘었다 줄었다
결국 제자리에
나는 여기에

여러 고비가 많았으나 논문을 완성했고,

심사에 통과했고(부족한 점 투성이었겠지만 그래도 졸업은 시켜주자며 교수님들이 너그러이 봐주신 것 같다),

여름에 졸업했다.

나의 삶에서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뿌듯한 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비록 읽는 사람 없는 논문일지라도 내 손으로 뭔가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 그 자부심(?)이 나를 벅차게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대학원 학위 수여식 날에 찍은 사진을 보면 어느 때보다 내 얼굴이 환한 모습이라 신기하기도 하다.

물속에서만 있어 숨이 멎을 것만 같다가 겨우 잠깐 물 밖으로 나와서 숨을 몰아쉴 때의 상쾌함을 느꼈던 것 같다.

좋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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