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9m: 약 먹어서 금방 나을 병이라면…

Chapter 2.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기 시작 2014-2019

by Luci

한 학교에서 5년간 근무하고, 근무 기간이 만기 되어 2019년에 학교를 옮겼다.

세 번째 학교는 예전부터 관심 있었던 학교로, ‘혁신학교’로 알려진 학교였고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를 좀 더 고민하며,

교사로서 좋은 교육 방법을 배우기 위한 계기가 되겠다고 생각해서 지원한 학교였다.

대학원까지 마쳤지만, 선생을 때려치우고 상담사로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상담을 배워보니 가르치는 일보다 상담하는 일이 몇 배는 더 어려운 일이고,

단순히 듣는 것을 넘어 인간을 온전히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일임을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교사보다 상담가가 더 타고난 사람이 하는 일이 맞다’라는 결론에 이르렀고,

내가 함부로 일을 그만두고 노선을 변경해 가며 상담하면서 더 만족감을 얻을 수는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 마디로

‘나는 엄마의 앓는 소리는 잘 들어주었지만,

상담가가 될 정도로 인간의 존재 자체를 깊이 있게 성찰하고 보듬어줄 사람이 아니구나’라는

냉엄한 분석을 내렸다.

석사 학위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분야를 선택해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공부했고,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논문까지 쓰는 것을 목표로 정해 그걸 달성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결국 선생으로 사는 길을 선택했다면,

그 일을 어떻게 만족스럽게 할 수 있는가를 찾는 것이 또 다른 과제였다.

그 과제도 잘 해내고 싶었다.

더 이상 선생으로 사는 일에 자괴감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새로운 학교에서 4학년을 맡아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겠다’라고 희망적으로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물론 나의 개인 상담과 병원 진료를 통해 정신적으로 다시 무너지지 않으며,

우울증이라는 걸 극복해 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2019. 5. 27(월). It ain’t over ‘til it’s over.

이제는 우울증 꼬리표 좀 떼어내는 건가 싶었는데... 몇 달 전 세 번째 심리검사 날짜를 잡으며 들떴던 마음은 이제 흐릿한 기억 속에만 남았다. 우울을 치료하는 약은 사람 자체를 바꿔주지 못한다. 달걀 모양의 작은 알약은 몸속으로 들어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 수 없는데, 다만 다람쥐가 먹이를 차곡차곡 모아두듯이 매일매일 삼킨 알약만큼의 우울 면역 세포가 생겨나 어느 시점에는 우울을 유발하는 상황이 와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알약의 효용은 마일리지처럼 적립되지 않고, 그날그날의 일상과 함께 소멸해 버리고 마는 것 같다. 약물의 화학작용 없이도 나의 정신세계는 안정된 상태로 기능할 것이라 보였던 것은, 세계를 뒤흔들만한 결정타가 외부에서 작용하지 않았던 덕분인 것 같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지긋지긋하게 내 삶을 갉아먹어 온 슬픔과 분노와 공허함은 제 몸집을 줄이고 구석에서 조그맣게 웅크리고 있었을 뿐, 결코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나를 떠날 때가 되지 않았고, 나도 그것들을 상대할 만큼의 맷집을 키우지 못했다. 카운터 펀치도 아닌, 기껏해야 잽 정도 되는 공격 한 방에 이 정도로 흔들리는 멘탈인데 약 없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래, 이 달걀 빛깔의 작은 알약들은 비타민 같은 거지. 아니면 마약 같은 것인가? 끊으려야 끊지 못하는 향정신성 약물. 아무나 먹지도 못해. 나만 먹는 특별한 약이라니까.’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을 해도 엿같은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구나. 대체 열심히 산 것도 죄인 건가?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울 일이 많은가. 누가 보면 세상에 안타깝고 불쌍한 일은 나만 겪은 줄 알겠다. 남들에게 ‘별일 아닌 것’이 왜 나에게는 ‘엄청나게 별일인 것’이 되는 건가.
아직은 약을 먹을 날이 여러 날 남은 것 같다.
그날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2019. 6. 1. Bohemian Rhapsody

엄마와 나는 여느 모녀 사이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세상 둘도 없는 원수처럼 치열하게 다투며 살아왔다. 나의 유년기 기억 속 엄마는 생활력 강하고, 가끔은 무섭고, 때로는 걱정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거대한 산속에 깊은 어둠이 깃들면 반짝거리던 나뭇잎들도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엄마에게 스며있던 어둠을 어린 시절에도 조금은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머리가 조금씩 크고 엄마의 어린 시절과 현재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을 즈음에는 연민의 감정이 조금씩 쌓였다. 엄마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점점 내 안에서 답답함으로, 나의 요구를 억누르는 것으로, 거역하고 싶었지만 고분고분 말 잘 듣고 조용한 딸이 되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러다 엄마와 아빠의 크고 작은 싸움이 계속되면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다가 ‘다른 집 아이들은 애교 부리며 엄마 아빠 화해도 시킨다는데, 애교는 고사하고 본 척도 안 한다.’라는 엄마의 비아냥을 감내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런 비아냥을 들어도 나의 태도는 달라질 리가 없었다. 나의 애교 따위는 소용없을 만큼 부부싸움의 골은 깊었고, 그 분위기는 진저리 나게 끔찍해서 어떤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사랑은 애교를 부릴 줄 아는 사람들에게 오는 것 같다. 아이가 격동의 사춘기를 거치는 동안, 부모는 나름의 애정을 자식에게 쏟겠지만 아이는 그것을 잘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애교를 부릴 줄 모르기 때문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엄마의 사랑을 잘 모르겠다. Queen의 Bohemian Rhapsody 노랫말에서 어머니에게 고백하듯이 나도 고백하건대 사람 하나 죽이고 살아온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죽이며 살아왔다. 나를 사랑해 주는 누군가를 알아차리지 못해서, 나 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서, 나의 부족함과 결핍을 증오하며 결국 나의 일부를 죽여가며 살아왔다. 그 죽은 일부가 계속해서 나를 좀 먹는 ‘우울’이라는 덩어리가 되어서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고 있다. 그래도 바람은 부니까 언젠가 ‘죽은 나’도 부활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그 ‘죽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숨기고 싶은 그 녀석을 천덕꾸러기로 대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때는 우울증 치료제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바람은 부니까. 그저 바랄 수밖에.
2019. 6. 8. Happy pills by Norah Jones

병원에서 의사가 심리검사를 다시 해보자고 했다. 마치 중요한 시험처럼 잘 치러야 할 것 같았다. 내 마음의 상태를 이런저런 도구로 재고 따진다는 것이 전에는 흥미로웠다면, 이제는 마뜩잖게 느껴진다. 우울이라고 써 붙인 내 마음의 일부가 어찌 기능하고 있나 누군가 들여보게 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부족하다는 부분을 강화하기 위해 두뇌를 활발하게 한다는 앱까지 설치하고 매달리는 나의 이중성이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며칠 전부터 마음이 한결 무거워지는 것을 간신히 추스르고 검사하는 날 두뇌 회전을 위해 양갱까지 먹어가며 집중하려 애썼지만, 순간순간 드러나는 나의 불완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래서 뭔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을 망쳐버린 기분이 들었고 또 좌절했다. 검사받는 것에 대한 중압감 때문이었을까. 며칠은 가슴이 답답하고 정신이 산란해져 결국 다시 병원에서 급한 대로 약을 구해다 먹었다. 그리고 조금 무너졌던 것이 메워진 기분이 들었다. 약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안타깝게도 약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애써 멀쩡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지내다가 상담 시간에는 결국 울음이 장맛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별일 아닌 일상의 버거움이 나를 내리눌러 밑으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오랜만에 상담 시간 내내 민망할 정도로 계속 울기만 했다. 눈물로 영혼을 익사시킬 것처럼 울었다. 상담이 끝난 뒤엔 이것저것 게걸스럽게 먹고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다음날 눈을 떠 거울을 보니 흠씬 두들겨 맞은 것처럼 눈이 부어 끔찍한 몰골의 내가 있었다. 꼬박 하루를 영혼 없는 사람처럼 보내고 나서야 다른 사람에게 크게 표 나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척하며 다른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아침에 약을 먹었던 것도 도움이 되었을 테고. 검사 결과는 내 예상보다 나쁘지 않게 나왔다. 의사는 나의 작업기억력 저하가 우울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았고, 몇 달에 걸쳐 약을 복용한 것이 효과를 보이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복용하는 항우울제의 용량은 반으로 줄었지만(5mg), 그럼에도 많이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는 상태라면 투약량을 늘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항우울제는 우울감을 줄여주는 것인지, 행복감을 더 느끼게 해주는 것인지, 아니면 괜찮아질 거라는 위안을 주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2019. 6. 17.

2주 전, 무기력감, 무의미함과 모든 것이 헛되고 공허하게 느껴지는 무게에 짓눌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 때가 있었다. 조금씩 쌓아두었던 그 우울함의 무게가 마침내 내가 버틸 수 있는 임계치를 넘어선 순간,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었다. 상담 선생님과 그날도 대화다운 대화를 했다기보다는, 그냥 한참 울고 또 울기만 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마침 다음날이 현충일이라 집에 있을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제자리인 것 같은, 어떤 날은 오히려 뒷걸음치는 것 같은 느낌. 내 뜻대로 안 된다는 절망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사실 자기 학대에 가깝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자꾸 탓하게 되었고, 또 그런 내가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다.
‘괜찮다’는 위로가, ‘사랑한다’는 위안의 말이 내게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을 들려줄 누군가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힘들다’는 짧은 그 한 마디를. ‘나를 보살펴달라’는 말은 대체 왜 머릿속에서만 휘몰아치고 있었을까.
겨우 용기 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과연 나를 사랑하는지 모르겠다고, 그리고 나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헷갈린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람은 헤어짐을 얘기해서 더 큰 시련을 주었다. 갑자기 불쑥 튀어나온 말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때부터였을까. 감각기관이 퇴화한 듯 어떤 것도 생동감 있게 다가오지 않았던 때가. 마비된 것인지, 기능이 멈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초등학교에서 3-4학년 아이들은 학교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선생님이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아이들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아이다운 모습도 있어 교사들이 선호하는 학년이다.

4학년 담임이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2019년에 만난 4학년 아이들도 참... 만만치 않은 아이들이었다.

남자아이들 몇몇이 당시 축구에 미쳐있었는데, 운동장에 나가서 축구만 하고 오면 매일 싸움이 났고

점점 수업 태도도 엉망이 되기 시작했다.

교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겠지만, 아이들의 이상함 정도(?!)는 기온과 정비례한다.

날이 더워질수록 말도 안 듣고 제멋대로인 아이들 때문에 손꼽아 방학만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한동안 교실에서 애들 때문에 화가 나서 운 적이 없었는데 방학 앞두고 7월쯤은 결국...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애들 몇몇 때문에 또 부끄럽게 울었던 날도 있었다.

2019. 7. 7.

지난 금요일에는 결국 학교에서도 내 멘탈이 무너져 내렸다. 제멋대로인 몇몇 아이들이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자 끝내 폭발했다. 교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가까스로 수업은 마쳤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들을 집중해서 마칠 수 없었다. 분노와 슬픔의 감정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학교에서 빨리 벗어나야 했다. 병원 정기진료 날이 아니었더라도 아마 병원을 찾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날은 평소보다 힘들었던 날이기에 기다리는 동안 나의 표정만으로도 의사 선생님은 내가 심상치 않게 보였나 보다. 예상대로 진료실에서 그간의 일을 얘기하다가 울고 말았다. 한 달 동안 줄어든 약으로는 슬픔을 제어하기 어려웠다는 것을 의사 선생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 판단에 오류가 생기고, 숫자 계산에 오류가 생기고, 집중에 문제가 생겼다. 우울증의 증상이 더 심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약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루를 겨우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χ(남자친구, 과거형이다.)를 만났다. 일주일 만에 조금 웃을 수 있었다. 헤어지고 난 뒤 터덜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새벽이 되면 잠이 들고, 아침에 눈을 뜰 때 새로이 또 하루가 흘러갈 것이라는 게 끔찍하게 느껴졌다. 아침을 먹고 약도 먹고 나니 청소를 할 수 있었고, 마른빨래를 갤 수 있었다. 지금 내겐 일상을 지켜가기 위해 약이 꼭 필요하단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먹으나 안 먹으나 별 차이 없이 느껴졌던 그 약 덕분에 사람 구실 하며 살 수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우울을 다스려 줄 약이 2배 늘어났으니 2배 더 행복해질 수 있다면, 동화 같은 기적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멀기에 안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늘 소망해 본다.
2019. 7. 20.

한 주가 참 길게 느껴졌다. 어떤 시간을 버틴다는 것이 참으로 버거웠다. 순간순간 무너져 내리려는 나를 어떻게든 세워야 했다. ‘괜찮냐’는 말 한마디에 겨우 틀어막았던 슬픔과 분노와 절망감과 고통, 무력감과 죄책감, 음울하고 어두운 온갖 감정들이 쏟아져 눈물로 토해내려는 것을 간신히 막아내야 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말 ‘괜찮아’ 보이게끔 잘 포장하고 (그럼에도 늘 괜찮지 않아 보이는 걸 숨길 수는 없었겠지만) 내 안의 거대한 우울을 잘 숨겨야 했다. 그러느라 늘 힘이 없었고 소진되기 일쑤였다.
상담을 받으면서 새삼 지난 주말 엄마가 집에 와준 것, 함께 밥을 먹고 전에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을 느끼게 해 준 것,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카페에 함께 가 준 χ의 배려를 실감했단. 스스로 보살핌이 너무 부족해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돌봄이 절실했던 것 같다. 내가 나에게 꽂은 칼과 얽매어 놓은 굴레를 덜어내고 다시 살아가려면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멀지 않은 곳에 밝은 빛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더 어두운 터널 속을 걷는 느낌이란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벗어날 수 있을까?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손으로 적던 일기는 여기에서 멈췄다.

2019년에는 사실 다른 이슈들이 많았는데 미처 일기장에 손수 적을 여유가 없었나 보다.

방학을 보내고 2학기를 시작하며 당시 나와 함께 학교로 전입해 오신 인성 부장님이

우리 반 아이들을 데리고 회복적 생활교육에서 진행하는 ‘서클 활동’을 해주셨던 일이 기억난다.

아이들이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라 전문가인 부장님도

‘얘네는 안 되겠다’라며 혀를 끌끌 차셨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그 말썽꾸러기들 몇몇에 굴복하지 않고,

이번에도 예쁜 아이들의 도움(?)과 나의 굳은 의지로 다시 1년을 살아냈다.

가을 무렵에 우리 반도 도와주시고 담임 맡은 1학년 아이들도 열심히 가르치신 부장님께서

아동학대 신고를 받고 결국 담임 직을 내려놓으신 일이 있었다.

6학년에선 어떤 이상한 학부모가 담임이 자기 아이를 나쁘게 만들고

학교 안 으슥한 곳(아이들과 종종 상담할 때 쓰이는 공간이었다)에서 아이를 상담하며 학대했다며,

언론사에 제보도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일도 있었다.

서이초 사건 전에도 2010년대 중반 이후로 학교 안에서 학부모의 민원 문제는 심각한 상태였다.

괴로움을 겪는 선생님의 이야기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다행히 내가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숨어서 비겁하게 안도하던 때였다.

좋은 교육을 한다고 알려진 학교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늦게까지 일하느라 저녁을 지나

때로는 밤까지 교실 전등이 꺼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그 학교에서도 교사들은 상처받아 아팠고,

병들어가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나의 우울증도 떠나보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겨울방학이 되었고,

그때 한창 외국의 길거리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베트남 북부 요리를 보고 빠져들어

‘저건 직접 가서 먹어봐야겠다’며 2월 초에 출발하는 저렴한 항공권을 끊어두었다.

하노이에 가서 구경도 하고, 눈 여겨둔 ‘우렁이 쌀국수’를 맛볼 생각에 한창 들떠있을 그때,

전 세계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바이러스가 2020년을 그렇게 쑥대밭으로 만들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다만 함부로 해외여행에 갔다간 난처한 일이 생길까 봐

환불 금액 한 푼도 못 받고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항공권을 취소한 그때,

나의 불운은 거기까지 인 줄로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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