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물에 빠져 허우적대며 가라앉기 시작 2014-2019
2017. 9. 11.
가을이다. 하늘이 맑고 예쁘다. 마음은 무겁다. 일기에 가득 적어놨던 나의 그늘, 어두움. 묵혀두어 푹푹 삭고, 곪고, 너덜너덜해진 내 모습의 일부와 마주할 때마다 계속 움츠러드는 나를 본다.
불안과 무기력과 분노와 한숨과... 일상을 조여 오는 나의 괴물들. 주말을 위해서 평일을 버티고 있는 생활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견디지 못하고 나를 해치면서까지 도망갈 구실을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나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 괴로운 일이다. 그래도 하루하루를 지우다 보면 조금은 즐거운 날이 오기도 하니까. 그렇게 믿고 나를 달래야 할 텐데... 여전히, 아직도 어렵다.
대학원 3학기 수업에는 상담 실습 과목이 있었는데, 그때까지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상담을 받아본 일이 없었다.
내가 상담도 받아보지 않고 어떻게 상담을 하겠나 싶어서 대학원 동기 중 한 분께 나를 상담해 주실 분을 추천받았다.
그 인연으로 R 선생님과 만났다.
R 선생님의 이름만 보고는 당연히 여자분이시겠지 했는데 남자분이셔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처음 상담의 시작은 2017년 8월 25일.
만나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접수면접지를 작성하던 그때부터 마칠 때까지 수도꼭지가 열린 듯이 울었다.
누가 보면 큰일이라도 난 사람처럼 계속 울기만 해서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는데, 그 눈물은 상담 선생님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칠 줄 몰랐다.
항상 상담이 끝나고 나면 코를 훌쩍이며 눈이 팅팅 붓고 시뻘게진 모습이었다.
누가 봐도 한참 운 얼굴로 집에 가는 길엔 부끄러워 고개도 제대로 들 수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울며 하소연이라도 해야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급히 상담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2017년 9월 20일 오후 1:51
선생님, 죄송하지만 여쭤볼 것이 있어서 문자 드립니다.
제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두근거림이랑 불안이 심해서
병원을 찾아가고 싶은데 소개를 부탁드리면 안 되겠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여쭤봐서 죄송합니다.
-> 학교에서 큰일이 있으셨네요. 많이 놀라셨나 봐요.
저는 **역에 있는 ###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잘 보시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계시는 곳에서 가까운 곳으로 좀 더 알아봐 드릴까요?
부탁드리면서도 죄송했는데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상황 보고 갈 수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시 나는 공황 상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수업 중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져 불편한 상태였고, 밤에 잠드는 것도, 깊이 자는 것도 힘들어서 피로감에 절어있었다.
불안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었다.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잠은 오지 않고 대개 그날 내가 실수한 것이나 잘못한 것, 후회되는 것들이 두서없이 떠올랐고,
겨우 잠이 들면 꿈에서도 어지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무서운 일들이 보여 도통 잠을 잤다고 하기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제대로 잠을 못 자니 매일 멍한 상태로 겨우 눈을 떴는데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거대한 돌덩이에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대체 나는 무슨 죄를 지었길래 시시포스 마냥 벗어날 수 없는 형벌에 갇혀야 하는 걸까’하는 참담한 심정으로 나선다.
아침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하면 또 쳇바퀴 굴리듯 하루를 보내기는 하지만, 점점 스스로가 영혼 없는 좀비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할 일은 또 어찌나 많은지.
대학원에서는 논문을 쓰겠다고 해서 논문 주제를 선정하기 위한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그래서 잘 모르는 논문을 찾아보고 읽어보아야 했다.
해야 할 일을 확인하는 체크리스트에서 할 일 목록이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쌓여만 가니 미칠 지경이었다.
특히 수업할 때면 간헐적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뭔가가 압박하는 느낌은 숨쉬기조차 힘들게 했다.
예전에 소파에서 한동안 앉았다가 일어날 때 어지럽고 시야가 하얘지며
몇 초간 ‘이대로 하늘나라에 가는 건가?’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던 미주신경성 실신과는 또 다른 증상이었다.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상담 선생님이 알려주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보고 약물 치료를 받았다.
몇 달은 매주 병원에 가서 상태를 보고하고 다시 약을 처방받아먹으며 버텼다.
이때도 병가는 내지 않았던 걸 보면, 엄마의 근성을 닮았나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말해도 교사로 일하는 것이 뭐가 힘드냐며, 다른 일도 다 힘들다고 선생보다 훨씬 힘든 일이 세상에 널렸다고 나를 가르쳤던 엄마도
내가 병원에 가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고 하자 많이 놀란 기색이었다.
걱정이 많이 되었는지 주말에 내가 사는 집으로 와서 이것저것 잔소리도 늘어놓고 지저분한 것도 치워주고, 밥 먹고 산책하자며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즈음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친구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하필 엄마가 토요일에 올라온 바람에 실컷 울었고 눈이 퉁퉁 부은 데다 기분도 울적했던 나
는 급한 일이 생겼다는 핑계를 대며 결혼식에 가지 못했다.
친구에겐 미안했고, 집에 찾아온 엄마에겐 고마움보단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못난이’였는데. 우울증이라고 결혼식도 못 가고 엄마에게는 불효를 했으니 ‘못난이’였다.
한편으론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고, 나에겐 매 순간이 모든 것을 쥐어 짜내며 최선을 다했던 때였다.
슬프게도 남에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런 시절이었다.
내가 우울증으로 치료받고 있다는 건 집안에서 쉬쉬하는 일이라, 엄마는 입이 가벼운 아빠의 입단속에도 신경을 썼다.
어디 나가서 친구 만나며 딸내미가 우울증이라 약 먹고 있다는 얘기는 일절 하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우울증이 무슨 역병도 아닌데.
얼른 그래도 낫게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덜컥 진짜 학교라도 그만둘까 봐 그랬는지
엄마는 어느 주말에 이모와 함께 용하다는 점집에 가서 지어온 것이라며 무슨 부적을 나에게 주었다.
집에 잘 갖다 놓으라고, 미신이라고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또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말을 하고 또 하면서.
어쩌면 그 부적이 진짜 용하긴 한가보다.
여태껏 일을 때려치우지 않고 선생 노릇을 하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