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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Her Story - 빛나는 졸업장

나는 이화여자중학교가 6년제로 바뀐 후 첫 졸업생이 되었다. 친구들은 4년제를 마치고 이화여전이나 상급학교로 진학했다. 4년제와 6년제 중 선택을 해야 했다. 고민이 되었다. 다른 아이들은 4년간의 학업을 수료하고 상급학교로 간다니 앞서가는 듯했고 나만 학교에 남아 뒤쳐지는 것 같아 초조했다. 

어릴 땐 낭만적으로 화가를 바라보고 꿈꾸었지만 철이 조금씩 들고 현실 세계를 알아 가면서 화가로는 험난한 인생길을 순탄하게 걷지 못할 거 같았다. 미군정이 들어왔고 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상이 손바닥 뒤집듯 돌아섰고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화가의 삶이 막막할 것만 같아 생각을 바꾸었다.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봉조 교장 선생님께 “저는 이번에 4년제로 마치고 <이화 여의전>에 가고 싶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안 돼. 너는 학교를 더 빛내고 6년을 모두 마치고 가라”고 했다. 그 말씀에 내 계획을 보류하고 다시 곰곰 생각했다. 그래, 2년을 더 제대로 공부해서 6년제 과정을 마치고 4년제 대학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여대는 가고 싶지 않았다. 마침 싱숭생숭하여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그해, 1946년에 남녀 공학으로 바뀐 <연희대학교> 영문과를 목표로 삼았다.

학교에 남게 된 두 해 중 첫해에는 농구부 주장으로 학교에 <전국 남녀 종별농구선수권 대회>의 우승기를 안기며 교장 선생님 뜻대로 학교를 빛내는 데 힘을 보탰다. 남은 한 해 동안은 내 꿈을 따라 대학에 가기 위해 농구와는 작별하고 공부에만 몰두했다. 

참으로 중학교 6년 생활을 알차게 보냈다. 6년 내내 따로 쉬거나 놀 틈이 없었다. 물론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생활하면서 짬짬이 쉬고 놀았겠지만 늘어질 틈이 어디 있나 싶게 뛰어다니며 학교생활을 했다. 배우고 알아가는 데 욕심이 있어서 더 많은 활동을 해보고 싶었지만 하루 24시간이 짧아 그럴 수 없었다. 방과 후에 그림 한 장씩 그리고 운동 연습하는 매일의 일정을 마친 후 전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에 집에 와서 책상에 앉으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앞뒤로 저어댔다. 그 질풍노도의 시간이 어떻게 눈 깜짝할 새 다 흘러가고 1949년, 졸업을 맞다니 완료했다는 성취감과 미래를 향해 부푸는 기대감에 뭔지 모를 설렘으로 빠져들었다. '잘 해봐야지.'를 되뇌며 속으로 다짐했다.

올해 2019년, 이화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지 70년이 되는 해를 맞았다. 그 긴 세월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만큼 나이 들었는데 학창 시절의 옛 기억이 생생히 나느냐고 묻는데 어떤 기억들은 마치 당시 그 현장에 서 있는 듯 아직도 또렷이 눈앞으로 흘러가서 그때처럼 흥분되기도 한다. 운동장에서의 함성, 응원 소리, 재잘거리며 몰려다니는 소리들, 그리고 동무들과 줄지어 가며 부르던 노랫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쟁쟁 울린다. 농구 팬이었던 임원식 음악 선생님이 우리 농구부원들과 이상훈 코치의 별명들을 모아 창작한 팀가(歌) ‘룰라 룰라 룰라~’를 불러대며 줄지어 걸었다. 참 흥겹고 신나던 시절이다. 나라도 국민도 힘없고 가난하고 보잘것없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이렇게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다는 것은 경이에 가깝다. 70년도 더 지난 지금도 중학교 생활 6년이 참으로 즐거웠고 행복했다는 생각뿐이다. 후대의 제자들이 존경했던 신봉조 교장 선생님과 자애와 열성으로 가르침을 준 선생님들 아래서 배우고 익히며 보람찬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나쁜 기억은 하나도 없다. 이런 학창 시절을 마치고 빛나는 졸업장과 함께 나도 드디어 ‘커다란 꽃다발’을 가슴에 안은 언니가 되었다. 인생에서 단단한 반석 하나를 또 딛고 올라섰다. 새로운 도전이 코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949년 6월 10일 제 30회 이화 여자 중학교 졸업식. 손글씨로 쓴 졸업장.
1949년, 단기 4262년 졸업식에서 받은 개근상장. 오른쪽에서부터 써나갔으므로 '위 학생'이라는 표현을 '우, 오른쪽'은 이라고 썼다.  
우등상장 제6학년 때. 

배꽃 문양의 졸업장

1949년 6월, 6년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다. 이 해에만 학사 일정이 바뀌어 6월에 졸업과 입학을 했다.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키가 작은데 어떻게 농구를 했냐는 질문과 운동을 하면서 학업을 따라갈 수 있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농구 우승기와 트로피는 많이 타봤지만 우등상을 매번 타지는 못했다. 공부는 따라갈 정도로 했다. 푸른 난이 쳐진 옛 백자 항아리에 졸업장과 상장들이 꽂혀 있었지만 집안 식구 중 누구도 이 빛바랜 종이 두루마리들에 관심을 두고 펼쳐본 적이 없다. 단기 4262년 6월 10일 날짜의 중학교 졸업장, 개근상장, 우등상장을 막둥이의 눈앞에 펼쳐 보였다. 고풍스럽고 단아하며 섬세한 멋이 돋보이는 증명서 둘레에는 배꽃과 꽃잎 문양이 그려 있고 숨쉬듯 힘이 느껴지는 붓글씨로 일일이 쓴 증명서의 손글씨는 지금도 놀라운 감동을 안겨준다. 떠나 보내는 스승의 정성과 떠나는 학생의 행복했던 노고(勞苦)가 이 몇 장의 낡은 종이에서 고스란히 전해온다. 이 졸업장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로 시작하는 졸업식 노래가 귓가로 흐른다. 21세기인 요즘도 이 노래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옛날 학생들은 이 노래를 부르며 선배도 후배도 눈물을 흘렸다. 졸업식장의 졸업생이나 후배들의 두 눈은 헤어짐이 서글퍼 눈물을 뚝 떨구기도 했다. 70년이 된 졸업장, 개근상장, 우등상장에 담긴 무언의 모든 가치를 다시금 목격한다. 

단기 4282년 6월 10일 졸업 기념사진.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 나의 바로 뒤에는 동생 '박창숙'.
1949년 이화중학교 6년제 졸업식.
졸업식 날. 왼쪽은 나의 친구 허세리, 두 번째는 나. 
졸업식 날. 나는 가운데.
어느 해 담임 선생님과 함께.
정형식 선생님과 견학 갔을 때 단체 사진.
이화 강당에 외부 손님이 오셨던 날.
개성 수학여행을 갔을 때. 선죽교에서. 나는 왼쪽에서 두 번째.
위 사진 뒷면 기록.
1949년  4월 8일, 이화중학교 시절의 마지막 단체 등산 갔던 날.
이화여자중학교 저학년 시절. 경복궁으로 견학. 경회루 제일 안쪽 다리에서. 나는 왼쪽에서 다섯 번째.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나는 뒷줄 오른쪽.
농구부 후배들 졸업식 날. 나는 첫 줄 왼쪽 첫 번째.
이화여자중학교 창립기념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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