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엄마도 직장에 나가기 바로 전 해인 1968년,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남산의 리라 국민학교 주관 사생대회에 나갔다. 자유화를 그렸는데 나는 어미닭을 좇아 먹이를 쪼는 병아리들을 그리기로 했다. 사실 일곱 살 이전에 마당에 날아들어오는 참새는 봤으나 서울에서 병아리를 봤던지 아닌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엄마는 대회를 준비하자며 '어미닭과 병아리'를 주제로 얼마간 매일 그림 한 장씩 그리도록 했다. 연습을 했지만 막상 대회장의 교실에 홀로 들어가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앉아 경쟁적으로 정해진 시간 내에 그림을 그리려니 혼이 나간 듯 정신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출중해 보였고 그림을 자신 있게 슥슥 그려나가기 시작했는데 나만 떨고 있나 싶었다. 내 머릿속이 하얘질 때를 대비하여 엄마는 36색 커다란 크레파스 상자 안쪽, 일렬로 줄지어선 크레파스 위 작은 공간에 슬쩍 보고 그리도록 '어미 닭과 병아리들'을 아주 작게 펜으로 그려놓았었다. 그런데 보고 그리고도 싶지 않았지만 엄마의 힌트를 보고 확인할 사이도 없이 큰 도화지를 메워 나가기에 급급했다. 다 그리고 나가려니 복도 창으로 보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엄마는 "잘 그렸어? 닭 벼슬도 안 뺐어?"라고 물었다. 나는 연습할 때도 빨간 닭 볏을 빼고 그렸었고 엄마는 그것을 잊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여전히 빼먹어 어미닭이 아닌 커다란 중닭을 그리고 만 것이다. 빨간 닭 벼슬을 안 그려서 상을 못 탈까 봐 나는 한껏 풀이 죽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닭 볏 없이도 다행히 우수상을 타게 되어 상패와 트로피를 안고 기념사진 한 컷을 찍게 되어 엄마의 기대에 조금이나마 부응할 수 있었다.
엄마가 80대 후반으로 들어선 2014-15년쯤 어느 날, "잘 그렸지?" 하면서 허접한 파지 뒷면에 닭과 양들을 그린 그림을 내밀었다. 참으로 사실적으로 잘 그려서 깜짝 놀랐다. 엄마의 닭과 양들 그림을 보니 나의 일곱 살 시절 그림 속 닭 볏이 오버랩되었다. 모녀의 공통점을 굳이 찾아보자면 같으면서 다른 길을 걸어온 엄마와 딸의 모습을 사소한 요소에서나마 엿본다.
여학교 시절에 미술부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옛이야기들은 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었던지 엄마가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몰랐다. 사실 엄마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거나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이야기는 가족 중 아무도 몰랐다. 몰랐다기보다 엄마니까 관심을 두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을 것이다. 엄마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고 싶고, 무엇에 관심이 있었는지, 무엇을 억누르고 살아왔는지, 그런 것들은 알고자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엄마는 항상 내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는 그런 존재였다.
그냥 심심해서 컵 받침의 문양인 닭이 예쁘길래 그대로 쓱쓱 그린 할머니의 솜씨 치고는 참으로 잘 그려서 놀랐다.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렸으면, 화가가 되고 싶은 꿈을 미리 이야기했다면 그림 수업을 들을 수 있게 했을 텐데…"하며 놓쳐버린 많은 시간들을 나는 못내 아쉬워했다. 실버타운 근처의 미술학원에 등록하자고 졸랐다. 걸어 다니기 힘들면 독선생님이라도 집으로 들이자고 했다. 엄마는 "때가 있는 법인데 이제는 에너지가 달려서 몸을 움직이기 힘드니 새로운 활동을 추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라고 답했다. 내게 그림 그리기를 알려주었던 때처럼 엄마가 그림을 재미나게 그리도록 해드릴 수 있게 되니 엄마는 이제 힘이 없어 할 수가 없다고 하신다.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감사할 일이고 많게 느껴지는 활동들을 줄여나가야 할 때가, 엄마 표현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왔다. 한 번도 불가능이나 포기를 내보이지 않았던 엄마였는데 나는 엄마의 이런 모습을 새로 발견하게 되었다. 교실 창으로 나를 들여다보던 쇼트커트의 젊은 엄마 얼굴이 또렷이 떠오르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