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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My story - 그럼에도 세상은 좀 변했거든요

엄마 집에서 저녁 겸상을 한 뒤 소파에 앉으면 TV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평행선을 그리며 앞을 보고 앉아있다. 평소에 집에서 보지 않던 일일 연속극이나 주말 드라마, 기타 프로그램을 본다. 엄마는 드라마를 같이 보자고 소파의 엄마 옆자리를 툭툭 손바닥으로 치며 앉으라고 하신다. "저 아이가 말이야. 어제 화가 나서"라며 드라마의 스토리를 풀이해주신다. 뻔한 스토리라 안 해줘도 되는데 말이다. 때로는 앞만 바라보며 우리 둘은 서로에게 뭐라 뭐라 하며 대화를 한다. 우리의 대화는 동문서답으로 빠지는 경우도 있다. 엄마가 귀가 어두운 것도 아닌데 어쨌든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져 진행된다. 재미나게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고 귀 기울여 들을 때도 있다. 우리의 대화와, 엄마와 내가 앉아 있는 풍경이 참으로 우스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아닌 것이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작년에 아이와 했던 275일 해외여행’ 중에 딸아이도 이와 같은 얘기를 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밀라노에서 니스를 향하는 중이었다. 아이는 재미있지?라며 우리의 대화, 장난, 그리고 함께 걷기만 했던 무언의 순간들 마저 녹화하면 재미있을 거라고 했다. 젊은 아이와 조금 늙은 엄마의 대화 못지않게 서울에서의 덜 나이든 할머니와 더 나이든 할머니의 일상 대화도 재미나서 웃게 된다. 나의 엄마가 잘못 알아듣고 엉뚱한 얘기를 하면 답답해서 툴툴거리지만 똘똘한 이 호호 할머니와 대화를 하다 보면 웃음이 툭 터질 때도 많다. 

아주 오래전에 나의 부모님도 젊고 우리 네 형제가 한참 어렸을 때, 흑백텔레비전이 등장했다. 친할아버지 댁에 가면 할아버지는 TV를 보면서 마치 드라마 속 배우를 실제 인물로 인지하는 듯 극의 내용을 따라가며 우리들에게 때로는 흥분하고 때로는 애석해하며, 기쁘거나 슬픈 어조로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현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하고 TV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인가 의아해하기도 했다. 이제 나의 엄마도 TV 앞에서 할아버지처럼 말하게 되었다. 감정이 최대한 이입되어 놀라고 화를 내고 주먹을 불끈 쥐고 무릎을 치며 TV에 대고 그렇게 하면 안 돼”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조선시대부터 살아온 구시대의 할아버지만 그러할 줄 알았는데 나의 엄마도 그렇게 되었다. 앞으로 나도 밟게 될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부인하지 않는다. 

소위 먹방’이라고 불리는 먹는 프로그램이 나오면 엄마는 혀를 쯧쯧 차며 채널을 휙 돌려버린다. 인생에 조금도 도움이 안 되고 먹기만 해 대는 방송을 왜 하냐며 한 마디 강하게 보탠다. 이럴 때면, 채널권은 전적으로 엄마에게 있어서, 엄마의 고정 애시청 프로그램으로 돌려야 한다. 몇 편의 드라마 외에 즐겨 보는 프로그램은 도전 골든 벨’이다. 질문이 나올 때마다 눈과 귀를 화면에 고정시킨 엄마에게서는 긴장감마저 역력히 보인다. 열혈 축구팬이 세기의 축구 시합을 보는 것 이상으로 엄마는 온몸으로 퀴즈 프로그램에 반응한다. 퀴즈의 문제는 모두 이해하는데 답은 입에서 맴돌며 속히 나오지 않는다고 애타 하며 무릎을 치거나 맞추면 박수를 치며 웃거나 까치발을 세우기도 한다. 그러다가 엄마는 문제 풀이는 어느새 뒷전이고 학생들의 복장, 태도가 불량하다고 지적하기 시작한다. 치마가 짧다, 머리 색이 왜 저러냐, 화장이 웬 말이냐… 등등 요즘 애들에 대한 불만이 상승무드를 탄다. 이런 의견에 동조를 해주면 좋겠으나 나는 그냥 냅두세요”로 일갈한다. 엄마는 계속 학생이 저러면 쓰냐. 어른들은 뭘 하고 있냐”로 넘어갔다가 교육이 이러니 세상이 이렇지’로 마무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입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사실 엄마는 나의 반응과 대구(對句)를 은근히 기대하며 손바닥 마주치는 소리라도 냈으면 하고 기대하는 듯한데, 나는 동조하지 않는 발언을 한다. 둘이 함께 있는 공간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이 에너지가 솟아 의견을 내고 흥분을 하는데 다른 한 사람이 묵묵부답으로 목석처럼 앉아만 있다면 두 사람간의 소통은 단절되는 것이고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의견에 맞장구를 치면 좋으련만 엄마를 닮아서인지 나는 빈말을 못한다. 그래서 참다가 머리에 물들이는 것도 한 때여요. 저 때 안 해보면 어울리지 않게 나이 들어서 한다니까요.를 넘어 “TV 속 남의 애들, 상관하지 마세요.까지 오게 되면 엄마는 벌컥 어찌 상관 안 하니. 나라의 미래인데!라고 큰소리를 낸다. <골든 벨> 데이의 저녁은 거의 이런 식의 대사가 반복된 뒤 끝을 맺는다. 

TV 속 배우들이 연기하는 허구의 인물들이나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한 실제 인물에게 엄마는 정도(正道)의 잣대를 들이댄다. 엄마 기준의 그 잣대는 여전히 유효할까? 나의 마지막 말은 언제나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변했어요. 엄마 생각 같지 않다니까. 이 구절은 이다음에 나의 딸아이로부터 내가 들을 대사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마지막 대사는 언제나 말할 건 해야 돼!이다. 아직은 엄마의 승’으로 골든 벨은 마무리되고, 나는 뒤돌아서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했던 갈릴레오처럼 '그래도 세상이 변했다니까 그러시네.'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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