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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02. 2019

Her Story -어머니 농구단으로 이어진 농구 사랑

중학교 때 시작하여 약 5년여 농구선수로 활약하고 1949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헤어졌던 농구공을 30년이 지난 뒤에 다시 잡게 된다. 1981년 남자 농구협회 임원이자 농구 대선배들의 제안에 따라 여중, 여고 선수 출신들을 모아 <한국 어머니 농구회>를 조직했다. 첫 회장은 당연히 선배가 먼저 맡아야 하니 나보다 8년 위인 윤덕주 선배를 추천했다. 어머니 농구단의 1대 회장은 윤덕주 선배가, 나는 1대 부회장, 2대 회장으로 어머니 농구단의 기틀을 세우고자 노력했다. 뿔뿔이 흩어진 옛 선수들을 모으는 일부터 첫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기획하고 지원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는데 어느새 39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이제는 후배들이 '어머니 농구회'를 척척 지휘해 나갈 정도로 확실히 자리잡아 운영되고 있다.  

국제 무대에서까지 대단한 활약을 펼쳤던 후배 박신자, 박찬숙, 이영희 선수를 포함하여 젊은 시절에 몸을 사리지 않고 농구 코트를 누볐던 많은 선수들이 어머니 농구회의 창단을 열렬히 반기며 활동을 재개했다. 아이들을 키우고 가정을 돌보면서도 짬짬이 시간을 내어 연습하고 경기를 벌였다. 젊은 날의 기량을 그대로 펼칠 수는 없으나 언제나 3점 슛을 시원스럽게 넣겠다는 의지만은 젊은 시절과 다름없었다. 선수들의 소속 팀은 출신 학교 별로 나뉘었다. 이화, 경기, 동덕, 숙명, 상명 등 1940년대 이후 여자 농구를 위해 뛰었던 선수들이 코트에서 다시 뭉쳤다.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어머니 농구회는 시야를 넓혀서 대만, 일본 등 해외 어머니 농구단과 매년 정기적으로 국제 친선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나도 오십 대에 접어들었으나 1981년 창단 초기부터 이화 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고 코트에서 뛰었다. 사오 년 후 더 이상 경기에 참가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91세가 된 지금까지 어머니 농구회와 후배 선수들을 지원하고자 각종 회의에 참석하고 매년 5월이면 열리는 학교 대항 어머니 농구 대회에 참여하여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한국 여자농구연맹의 '상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농구에 대한 사랑을 항상 표했다.

2018년 말, '농구동우회'에서 매년 준비하는 선배 농구인의 환갑, 고희, 산수, 졸수 생일 행사에서 나는 졸수를 축하하는 꽃다발을 받았다. 올해 우리나라 농구인 동우회 명단을 보니 나의 위로 무수히 많던 선배 이름들이 사라졌다. 나이 많은 순서로 여섯 번째, 여성 농구인으로는 첫 번째로 나의 이름이 올라있다.  농구와 연을 맺고 농구계에서 한데 어우러지며 보낸 80여 년 동안 가슴 뿌듯한 행복을 누렸다.

'농구 동우회'에서 90세 졸수를 축하해주던 날. 서있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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