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것을 배우며 어린이만의 작은 사회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흥미롭고 다 재미있었다. 91세가 된 지금도 내 안에 항상 호기심이 인다. 모르는 것은 찾아보고, 풀어보고, 이해해야 답답함이 해소된다. 외래어도 넘쳐나고 새로이 조합하여 만든 명사, 명칭이 자꾸 눈에 띈다. 게다가 신기한 물건도 많이 생기니만큼 신생 단어도 따라 새로이 창조되니 모르는 말이 참 많아졌다. 거리의 간판에 적힌 명칭이 왜,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도 알고 싶다. 을지로 통, 종로통에 최근에 지어진 빌딩들이 도대체 높이가 얼마가 되고 몇 층으로 지어졌는지도 알고 싶다. 최근에 집에서 사진을 인화하는 자그마한 기계를 선물 받았다. 이 기계가 어떤 원리로 사진관을 대신하는지도 나는 파악하고 싶다. 지금까지도 '알아봐야지', '해봐야지'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팔십 몇 년은 넘는 세월 동안 호기심을 품고 살았다. 이런 호기심들은 나를 작고 큰 꿈으로 이끌고 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소학교 4학년, 미술시간에 채소를 그리라고 했다. 나는 오이, 당근을 그렸다. 그림을 잘 그리는지 몰랐는데 놀랍게도 내 그림이 뽑혔다. 잘 그렸다고 판단했는지 선생님은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주었다. 내가 보기에도 홍당무를 진짜처럼 잘 그려서 나도 신기했고 ‘어? 내가 그림을 잘 그리나?’하는 생각을 했다.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져서 이미 화가가 된 나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언젠가 화가들이 반코트 같은 가운을 입고 멋진 베레모를 쓰고는 팔레트를 엄지손가락에 끼고 능숙하고 우아한 움직임으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베레모에는 꼭 사과 꼭지처럼 작은 꼭지가 달려있었다. 어느 길에서인가 이런 차림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를 본 적이 있는데 너무나 멋져 보였다. 주로 일본에서 미술공부를 하고 돌아온 초기 서양화가들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멋져서 나도 이다음에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은연중에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그림이 뽑혀서 교실 뒤에 보란 듯이 걸리니 자신감도 생기고 '화가가 되어도 되겠다', '화가가 되어야지' 하고 난생처음으로 큰 꿈을 하나 품었다. 붓글씨 쓰기도 배우며 나름 열심히 써봤는데 그것은 뽑히지 않았다. 그러니 반작용인지 붓글씨에는 더 관심을 두지 않고 화가가 되는 꿈을 강하게 키웠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부모님들은 눈치로 이 아이가 그림쟁이가 되려나 했을 텐데 별말씀이 없었다. 이 꿈을 소중하게 품어 나중에 중학생이 된 후 농구부며, 육상부며 힘든 운동선수 활동을 하면서도 화가의 꿈은 놓지 않으려고 미술부 활동을 병행하며 매일매일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첫 꿈도 다 이루어지는 법은 아니다. 자라면서 현실이 내건 조건과 사고의 변화에 따라 꿈도 희망도 소망도 모두 수정되고 변하고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에는 내적 요인보다 당시 급변하던 현실적인 이유가 훨씬 컸다. 일제강점기가 지나가고 미군정이 시작되었고 '미국물'이 들어왔다. 나라도 학교도 확실히 안정되게 방향을 종잡지 못하는 와중에 학생도 일반 시민인 동네 사람들도 키질에 몰리고 쏠리는 콩 알갱이들처럼 우왕좌왕했다. 그러다 상상도 못 했던 6.25 전쟁이 터졌다. 격변의 시대를 맞고 미래는 불확실했다. 이런 외적 조건에 맞춰 나의 꿈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 한 소녀, 한 소년, 그리고 한 개인의 얼마나 많은 꿈들이 현실의 변화와 상황에 따라 포기되고 바뀌고 버려졌을까. 그렇지만 오래 살아보니 첫 꿈이 순순히 평탄하게 이루어졌으면 인생이 재미있지 않았을 것 같다. 현실에 대처하며 살아가기 위해 미래의 직업을 화가에서 의사로 바꾸었고, 또 나중에는 영문과 교수로 바꾸었지만 또다시 닥쳐온 혹독한 현실 때문에 결국에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인생의 업을 완수했다. 직장인이 나의 어릴 적 꿈은 결코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눈앞의 현실을 하나하나 극복해가며 변화하는 과정 중에 나의 상황에 맞는 것,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고, 완수하는 과정을 겪으며 얻는 성취와 재미가 인생의 짜릿한 참맛임을 느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