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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Aug 31. 2019

Her Story - 때때옷


무릎까지 오는 한복 치마저고리를 창신 학원에서부터 창신 소학교까지 줄곧 입고 다녔다.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초반의 소학교 시절에는 통이 넓지 않은 무릎길이의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앞머리를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했지만 유일하게 남은 소학교 사진에서처럼 어머니는 한동안 조선식으로 앞가르마를 타고 뒤로 곱게 땋아 붉은 댕기를 묶어서 내보냈다. 나의 의견보다는 부모님의 의견에 ‘네’ 하고 100퍼센트 따랐을 때이니 입혀주는 대로 입었다. 이런 차림은 머지않아 머리부터 신발까지 바뀌게 된다. 변화는 성급하게 불어왔다. 나마저도 머리를 귀밑으로 싹둑 자르고 서양식 옷을 입게 된 것이다. 

어른들은 흰색 한복을 주로 입었다. 6·25 때, 돈암동 산너머에서 내려오는 피난민들이 허연 개울물길을 이룬 것처럼 보인 것도 거의 모두 흰옷을 입어서였다. 우리 어머니도 그랬다. 항상 하얀 한복 차림이었다. 소학교 때 단체로 남산 신궁으로 참배 가는 날, 따라왔을 때도 흰 한복을 입고 왔다. 어쩌다 외출할 때는 옥색 치마에 정성스럽게 풀을 먹여 빳빳하게 다린 흰모시 적삼을 곱게 차려입고 문을 나서면 최고로 멋스러웠다. 그게 당시의 멋이었다. 진정한 멋은 시대가 변한다고 해서 변질되지 않는다. 2019년일지라도, 요즘 궁궐 근처에 한복이란 이름으로 아무렇게나 근본도 없이 입고 다니는 옷에 비해, 옥색 치마에 모시 적삼을 곱게 입고 나선다면 우리식의 단아하고 우아한 멋에 감탄하는 최상의 찬사가 터져 나올 것임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어머니는 성장하는 세 딸의 옷과 아버지, 어머니 옷, 두루마기부터 저고리, 속곳까지 손수 지어서 입혀주셨고 나와 언니의 옷은 막내인 나의 동생이 물려 입었다. 과중한 집안일의 무게는 조금의 쉼도 허락하지 않았고 엄마는 묵묵히 다 해내셨다.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이란 땀 흘려 일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대부분 집에서 옷을 지어 입었고 어머니는 프라이팬처럼 생긴 숯 다리미에 숯을 얹어 다림질을 하셨다. 나는 옆에 앉아 천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며 다림질을 돕는 척하고 구경을 했다. 숯불에서 벌건 불가루가 자칫 반딧불이처럼 날아와 다리던 흰 천에라도 떨어지면 검댕이 자국이 나거나 작은 구멍을 내고 타 들어갔다. 조심해서 다려야 하니 더욱 정성을 기울였다. 나는 별것 아닌 작은 것에서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정성을 기울이는 옛 어른들의 일상을 보고 자랐다.

1956년에 시집갈 때 인두와 함께 이 구식 다리미를 들고 왔으나 숯 다리미를 내가 직접 해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 나는 묵직한 전기다리미를 사용하는 신세대가 되었다. 80세가 되어 실버타운으로 이사 갈 때까지 나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사용하던 이 숯 다리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다리미를 떠올리니 이불 홑청을 빳빳하게 펴려고 다듬잇돌을 두들기는 방망이 소리가 생각난다. 직장을 다니느라 대부분의 살림은 도우미가 척척 해놓았지만 나도 주말 어느 날에는 이불 홑청을 빳빳하게 펴느라 나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처럼 가끔 다듬이질을 했다. 이 소리를 요즘 20대, 30대가 이해할까 싶다. 나는 이 소리에 얽힌 슬픈 사연이 없음에도 다듬이 방망이 두들기는 기억 속 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면 슬픔도 서글픔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가움은 더욱 아닌, 묘한 감정이 인다. 손에 잡히지 않는 흘러간 시간을 추억하며 상념에 사로잡힌다고나 할까.  

어머니는 솜씨가 좋았다. 언제 만들었는지 모르게 나를 위해 지은 한복을 꺼내어 입혀주셨다. 일상복, 설날을 위한 색동저고리, 그리고 명절을 위한 때때옷이었다. 색동저고리는 색색의 천을 잘라 띠를 꿰맨 것이 아니라 무지개처럼 여러 색이 이어진 천을 따로 팔았다. 이런 천을 떠다 만들어주신 색동저고리도 기쁘게 입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간단한 신식 치마는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텐데 서양식 옷은 만들지 않았다. 신나게 뛰어놀고 들어와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잠이 든 내 옆에서 어머니는 바느질을 했다. 그 장면을 한쪽 눈이라도 뜨고 살짝 엿보는 목격자도 되지 못하고 한낮에 실컷 뛰어놀았던 나는 밤이면 곯아떨어졌다. 날이 밝으면 어머니는 “입어봐라” 한 마디로 무심한 듯 새 옷을 척 내밀곤 하셨다. 고운 새 한복 치마저고리가 잘 맞을지 두근대며 저고리 소매통에 팔을 끼워 넣으면 소매통의 양면이 서서히 벌어졌다. 이때 사각거리는 천의 질감이 주는 시원한 맛은 어린 가슴을 설레게 했다. 어머니는 곱게 고름을 매주었다. 이렇게 보고 자랐으니 이때까지 고름을 못 매거나 고름의 방향이 어느 쪽인지 헷갈린 적이 없다. 어머니가 해준 고름처럼 늘 반듯하게 매려고 했다. 동정을 새로 달 때도 양끝이 정확히 맞물리게 꿰맸다. 그것이 옷 입는 법이었고 항상 그 선에서 어긋나지 않게 한복을 입었다.

소학교 고학년에 올라갔을 즈음 동네에 맞춤 한복점이 문을 열었다. 신식 의상실이 대단하게 개업했다기보다 손놀림도 재고 솜씨가 좋은 주부가 가정집에서 부업으로 시작한 정도였다. 가끔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그곳에 가서 한복을 맞춰주었다. 특별한 옷은 아니고 일상복이었다. 자라면서 버선은 양말로, 고무신은 운동화로 갈아 신게 된 것처럼 세상은 슬금슬금 변했다. 아이들은 검정 고무신, 어른들은 하얀 고무신을 신었는데 어느새 검정 고무신은 세상 사람들의 눈과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교복을 입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평범하고 소박하며 곱기도 한 한복, 때때옷들은 점차 장 속의 한자리를 차지했고 어쩌다 꺼내면 나프탈렌 냄새를 맡았다. 향, 내음, 냄새는 과거를 재빨리 소환해내는 신기한 매체이다.  향은 기쁨, 설렘, 두근거림, 기분 좋은 옛날을, 냄새는 어둡고 슬픈, 충격적인 장면과 연결시켰다. 코끝을 자극했던 나프탈렌은 옷 입기 전에 날려보내는 냄새가 있었지만 철이 바뀌면 장롱에서 꺼내 입는 새 옷의 향이고 엄마의 손길이 느껴지는 내음이었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도 추운 날 입는 신식 오버코트가 있었지만 겨울이 오면 어머니가 만들어 준 두둑한 까만 두루마기를 입었다. 서양식 오버코트는 고학년이 되었을 때 입었다. 언니는 굵은 대바늘로 아주 두꺼운 목도리를 짜서 목에 둘러주었다. 그거 하나면 추위를 몰랐다. 목도리는 항상 빨간색 실로 짰고 끝자락에 술을 아주 길게 늘여 달아서 찰랑거리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고등학생이었던 겨울, 한강에 스케이트를 타러 나갈 때도 바지 차림의 교복에 그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갔다. 빨간 술을 날리며 꽁꽁 언 한강 위를 씽씽 달리면 추운지도 몰랐다. 스케이트를 특별히 배운 것은 아닌데 친구들과 몰려가서 빙판 위를 지치곤 했다. 온몸으로 추위와 바람을 받아내야 했다. 아마도 그런 추위 속에서 사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버텼는지, 어린 마음에 노느라 추운 줄도 몰랐는지 코끝이 빨개지고 들숨 날숨에 콧속이 얼어 쩍쩍 달라붙는 한 겨울에 나의 아이들에게도 이런 목도리를 둘러줬었다. 목도리 속으로 조그마한 아이들의 얼굴이 푹 빠진 채 걸어 다녔다. 나의 어머니가 살아왔던 대로 나도 살아갔고 나의 아이들도 살아갔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시대가 부여한 변화가 개인의 삶에도 차곡차곡 영향을 주었다. 긍정적으로 표현한다면 발전되어 나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30년대에 내복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겠지만 날이 추워지면 어머니는 내복을 입혀주었다. 무릎이 금세 뚫어져 구멍이 나면 꿰매고 기워서 입혔다. 목도리를 둘러 바람을 막고 내복을 입어 추위를 막던 습관은 90여 년간 한결같이 이어졌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쉽게 고쳐지지 않고 변치 않는 습관이다. 의식주 중 '의'와 관련된 습관은 눈이 알아채기 전에 피부가 먼저 감지했다. 그럼에도 세상이 변하여 한복은 일 년에 두세 차례 입기 어렵게 되었다. 나의 장롱 속에서 언젠가 입을 것이라며 보관해 두었던 솜을 둔 한복, 남편의 조끼, 마고자, 바지, 두루마기, 이제는 누구도 만들어 입지 않을 속곳 등 나의 오래된 한복들을 실버타운으로 이사 오던 80세 어느 날, 단국대학교 민속 복식 박물관인 <석주선 기념 박물관>에 기증했다. 남겨진 향으로 나의 옷들을 추억한다.

2019. 6 25. 단국대학교  민속 복식 박물관, 석주선 기념 박물관 방문. 10년 전 기증한 한복을 수장고에서 만져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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