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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16. 2019

'떼아트르 리브르', 오화섭 교수와 나

Her Story

1953년 2월 23일, 부산 전시 임시 연희대학교를 졸업하고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에서 직장생활을 막 시작했을 즈음, 당시 시, 희곡 등을 가르치던 연희대학교 영문과의 오화섭(1916~1979) 교수가 나를 포함해 동국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울 공과대학교, 연희대학교 출신 졸업생들(전 아나운서 임택근, 88 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이기하)을 불러 모았다. 극단 <떼아트르 리브르(자유극장)를 창단하자고 제안했다. 극단 이름도 프랑스어로 근사하게 이미 지어와 발표했다.

전쟁은 아직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위태롭기도 하고 단조롭기도 한 부산에서의 일상생활은 꾸역꾸역 이어지고 있었다. 전시 상황에 무슨 연극이냐고 하겠지만 이렇듯 피난지 부산에서도 나름대로의 문화적이고 낭만적인 일상사가 꾸려졌다. 우리는 타지에서 먹고사는 생존만을 위한 삶 이외에 인생에 윤활유가 되는 무언가를 필요로 했다. 나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부산 동아대학에 연습할 공간을 빌렸고 직장 일과를 마치고 한데 모여 연극 연습을 했다. 동아대학에 꽤 그럴듯한 무대를 설치하고 두어 편의 연극을 올렸다. 연극 제목이 뭔지 생각나지 않는데 한 편의 연극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시그리드였다. 지금도 그 이름이 기억난다. 신입생이었던 내게 선배 차범석이 권유한 첫 연극 무대에서의 경험이 여기까지 나를 이끌었고 내 인생 최고의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휴전이 되었고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피난지 부산 생활을 털어내고 집도 회사도 서울로 환도했다. 전후 서울의 새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오화섭 교수가 본격적으로 떼아트르 리브르 이름으로 연극을 하자고 또 청했다. 두 번 청했는데 한 번은 주인공을 하라고 했고 두 번째는 서대문에 있던 동양극장에서 올릴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어머니 역을 맡아보라고 했다. 나는 오 교수의 제안을 거절했다. 서울에는 아는 사람도 많으니 끝까지 무대에 안 서겠다고 버텼다. 괜히 창피할 것 같았다. 그 역할은 이화여자대학교 출신 여학생 이순자에게 돌아갔고 남자 배우로는 임택근이 무대에 섰다. 이후 연극 무대와는 멀어졌다.

오화섭 교수의 부인은 이화여대 영문과 박노경 교수로 이화여대 연극부를 이끌며 '시공관(옛 명동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올리기도 했고 오화섭 교수님이 이를 지원했던 기억이 난다. 피난지 부산의 불안정한 상황에서도 연극에 대한 교수님의 열의는 사그라들지 않아 꾸준히 연극 활동에도 몰입했다.

2005년, 연세대학교 <연세 극예술연구회>는 연세 창립 120주년을 기념하는 홈커밍데이에 노천극장에서 올릴 연극 '한여름 밤의 꿈' 무대에 서라고 제안했다. 나는 나이 탓으로 고사를 했다. 나보다 두세 살 어린 후배 임택근은 이 연극에 출연했다. 나는 제작발표회와 공연만 보러 갔는데 반달 모양을 그려 넣은 노란 티셔츠를 기념으로 받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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