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여름, 드디어 휴전이 되었다. 3년이나 살았던 부산의 엉거주춤한 단칸방 살림살이를 거두고 서울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 나무 대문을 삐거덕 밀고 들어왔을 때의 그 감촉과 소리의 여운은 손바닥에 아직도 남아 있다. 내 집, 우리들의 보금자리에 안기는 기분이었다. 살림살이도 떠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있었다. 옛날이야 지금처럼 살림살이도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루에 흙먼지가 두텁게 끼어 있었다. 전쟁 초기에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장에 박힌 총탄 자국이 더욱 또렷이 보였지만 내 집에 대한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나, 그 어디에 가서도 어디로 돌아가서도 메울 수 없고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젊은 시절 최고의 황금기를 이 집과 서울 연희대학교 본교에서 생활하지 못한 아쉬움, 전쟁 발발에 대한 원망은 근 70년 동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 대학 1학년 때 꿈을 설계하고 미래를 향한 계획을 세웠는데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계획은 안 세우느니만 못했고 무계획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나을 뻔했다는 회한이 밀려왔다. 바로 내일, 1분 후 일어날 일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겠지만 무계획으로, 맹목적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나와의 경쟁을 다시 시작했다. 넉넉히 잡아 75세까지 산다고 해도 내 앞에 50년이 남아 있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하루를 받아들이고 작은 세부 계획들을 세우고 나아갈 방향을 잡아가며 알차게 살아가야 했다. 나는 젊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16년을 더 살고 있으니 이 긴 삶을 무계획적으로 살았으면 지금 이 위치가 아니고 다른 ‘좌표’에 엉뚱하게 서 있을 것이다. 그 길은 바람직한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함께 부산 생활을 했던 친척들도 각각 서울과 인천의 제 집으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함경도에서 부산으로 혈혈단신 피난 내려와 우리 뒷집에 살게 되어 친하게 지내던 동국대생 친구는 38선이 그어져 북으로 올라가지 못해 오갈 데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우리 집에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자매처럼 오래 함께 살았다. 서울은 어수선했고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웠다. 피폭당한 건물들은 무너져 폐허를 이루었고 불에 타 일부는 부서지고 일부는 그을린 채로 남겨진 집들도 있었다. 피난지인 부산에 도착한 첫날도 암담했지만 파괴된 서울의 참담한 광경은 환도의 기쁨을 밑바닥까지 가라앉혔다. 무섭고 두려웠다. 아버지는 나이 들어갔고 어머니는 신장병으로 고생했다. 종로 3가에 살던 언니는 젖먹이들을 키우며 언니의 살림을 해나갔고 나는 직장인이고 동생은 대학생이었다. 그나마 기쁜 일은 동생은 임시 가건물과 텐트가 아닌 제대로 된 대학 캠퍼스에서 공부하게 된 것이다. 내게 가장의 역할이 자연스레 부여되었고 어깨는 무거웠다. 다행히 우리 집은 폭격을 맞지 않은 채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적어도 집을 다시 세울 엄청난 노력과 노동과 비용을 추가하지 않고 잠잘 수 있는, 온전한 네 벽과 지붕이 있는 우리만의 닫힌 공간, 따스함이 배어 있는 이 집에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