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19. 2019

Her Story - 나의 종로시대

하루하루는 당연히 일희와 일비가 엇갈리며 다가왔다. 폐허가 된 서울 모습과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일상생활을 눈앞에 두고 낙담했다면 기쁜 소식도 들렸다. 나의 직장인 UNKRA도 부산의 짐을 꾸려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용산의 사무실을 완전히 세팅하고 자리를 잡자 우리 부서, 즉 한국 문화예술을 미국에 알리는 업무를 담당하는 맥큔이 이끄는 부서만 따로 떨어져 시내로 나왔다. 사무실은 경복궁 안, 왼쪽 끄트머리 터에 자리를 잡게 되어 옛 중앙청 왼쪽 담장의 문을 통해 출입을 했다. 간단히 말하면 경복궁 안으로 내가 출퇴근하게 된 것이다. 경복궁 안에 사무실이 있다니 신기하기만 했다. 이화여자중학교 시절에 견학을 왔을 때 경복궁내 담장도 무너진 상태로 있었고 허술했지만 경복궁의 궁들과 경회루를 돌아보며 단체 사진도 찍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왕궁을 보던 감흥이 새로이 일었다. 용산은 시내라고 할 수 없는 먼 곳이었고 집에서 가까운 광화문으로 출근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행운이 또 한 번 나를 밀어주는 듯했다.

동양학을 연구하는 맥큔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일을 추진했기 때문에 후에 초대 국립박물관장이 된 김재원 선생님, 사학과 교수가 된 고고학자 손보기 선생님 등 한국 문화유산을 지키고 연구하는 분들이 주로 사무실에 방문했다. 손보기 선생님은 유적지 발굴 현장 사진을 들고 무척이나 자주 와서 맥큔에게 보여주고 설명을 길게 하고 돌아가곤 했다. 맥큔은 동양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고 어떻게 하면 한국 문화를 미국에 알릴까 고심했다. 전쟁 와중에도 신사임당을 미국에 알리려고 애썼다. 우리 부서에서는 혼란한 세상의 한구석에서 그런 일을 해나갔다. 

사무실에 여자 직원은 나 혼자뿐이었다. 번역과에서는 남자 직원만 채용했고 무척 많은 남자 직원들이 번역 일을 바삐 하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때 ‘여자 직원은 왜 없을까?’ 자문했다. 나는 번역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환도한 후, 얼마 지나 우리 식구는 남산 아래 필동으로 이사를 했다. 마침 사무실마저 광화문으로 옮겨져 출퇴근은 용이하게 되었다. 부지런히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개인적으로 보면 삶의 퍼즐이 안성맞춤이다 싶게 아귀가 잘 맞아 들어갔다. 서울 ‘핫플레이스 Hot Place’들이 밀집한 중심지에서 ‘9 to 5’ 생활을 하는 젊은 직장인이었다.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현모양처'가 여성들의 일반적이고 전형적인 삶의 형태였으므로 결혼한 친구들 중에는 바깥 생활을 해야 하는 필연성을 느끼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각자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에 대해 언급할 필요 없이 나의 길을 꾸준히 가는 것이 중요했다. 

일한다 싶게 즐겁게 일하고 있는데 나의 상관인 맥큔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영영 귀국한다고 했다. 그해가 1954년이다. 전쟁 후 환도하여 이제 본격적으로 일하는 즐거움에 가슴이 벅찼는데 나의 보스가 떠난다는 소식은 사무실뿐만 아니라 특히 내게 먹구름을 띄웠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내가 <아시아재단>으로 옮겨 일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시아재단은 1954년 설립된 미국 비영리단체인데 같은 해 우리나라에도 설립되어 전후 복구 사업을 지원했다. 현재는 아시아 18개국을 지원하며 현시점과 상황에 맞게 다양한 공조를 이끄는 재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전쟁통에 운명이 바뀐 것인지, 대학을 다니며 시작한 첫 아르바이트부터 스물여섯 나이에 벌써 몇 군데 직장도 경험했는데 또 옮겨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게다가 '코리아 타임스'에서 아시아재단에 입사하기는 굉장히 어렵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서 두렵다고 답했다. UNKRA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UN기구였으므로 이직하지 않고 계속 안주해도 좋았다. 나의 겁난 얼굴에 맥큔은 일단 가보기나 하며 용기를 북돋웠다. 그녀는 직접 나를 데리고 가서 대표인 필립 로(Philip Rowe)에게 소개했고 나는 인터뷰를 치렀다. 전 인생을 통해 누군가가 추천하여 취직이 된 경우는 아시아재단에 들어갈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합격 소식을 듣고는 순조로운 입사에 놀라고, 새로운 직장에 대한 기대로 설렜다. 참으로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필립 로는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소아마비에 걸려 한참 고생하다 그만 세상을 뜨게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사망하면 한국에 묻어달라는 그의 소원대로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직원들 모두 산소에 함께 갔다. 필립 로 대표의 뒤를 이어 메리 워커가 왔다. 사십 대쯤으로 보였는데 그녀와 나는 친근하게 지내면서 업무를 해나갔다. 후에 미국에 가서 결혼을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세 번째 대표로는 로렌스 톰슨, 네 번째 대표로는 제크 제임스가 부임했다. 톰슨 대표는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했고 아내와 함께 서울에 부임했다. 내가 아시아 재단에 몸담고 있을 때 네 분의 대표가 거쳐갔고 매 순간 재미와 보람으로 함께 일하며 사회생활을 알아갔다.

아시아재단에 입사한 후 사무실을 정리하는데 파일 박스에서 내 자리에 지원한 이력서 30여 장을 발견했다. 그중에 이화여고와 연세대 동창이 2명이나 있었다. 아는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큰 고민 없이 취직되고 길이 열리니 무엇보다 무척 감사했다. 하지만 절대 거저 쥐어진 것은 아니다. 나는 어느 지위까지 올라가겠다거나 하는 원대한 야망은 없었으나 나의 능력을 펼칠 수 있는 방향을 향해 차곡차곡 준비하며 나아갔고 지금까지 삶은 준비한 만큼 열렸다. 당시 아시아재단은 종로 인근 어딘가에 있었다. 나의 ‘종로 시대’가 시작되었다.

나는 유일한 여성 한국인 직원이었고 대표의 비서 겸 여러 업무를 두루 맡아서 처리했다. 상근 직원으로는 이미 서울대 예과를 다닌 조동재 씨가 한국인으로 제일 높은 위치에 있었고 비상근 직원으로 조풍연 씨도 있었다. 조풍연 씨의 아내와 안면을 트고 지내는 사이가 되어 집에도 초대받아 놀러 다니며 서로 왕래를 했는데 훤칠하고 시원시원한 분이었다. 조풍연 씨와는 재단의 외부 활동도 함께 했다. 그는 입담이 좋아 문학적이고 예술적인 재미난 이야기를 즐겨해 주었고 유머 감각이 매우 뛰어났다. 후에 TV에서 유명인으로 그를 자주 보게 될 때마다 번번이 옛 생각이 났다. 내 아이들에게 엄마와 함께 일했던 사람이라고 으쓱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일터로 오가던 종로통은 서울의 중심이었다. 큰 빌딩이 생긴 것만 제외하면 나의 종로시대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게 보인다. 서울은 부서지고 망가지기도 했지만 형편없어서 부끄러워할 정도의 모습은 아니었다. 전쟁 전후에 미군들이나 종군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을 보면 오지에 가까운 먼 시골 또는 전장을 오가며 촬영해서 지극히 어려운 우리네 생활 면면을 포착한 듯하다. 지금과 비교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물론 많았지만 서울 모습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서울은 그래도 수도였으니까.  전쟁 전후에는 갑자기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나 기타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아져서 더 복잡해졌고, 난처하고 구차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삶은 누구에게나 힘들었지만 나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어려운 상황을 넘으며 이겨내고 살아왔다. 하나 넘고 하나 넘고 그러다 보니 90년이 가버렸다.

환도 후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는 봄 소풍을 멀리 남한산성까지 갔다.
아세아 재단(현재는 아시아 재단으로 불린다)에서 일하던 시절 나의 보스인 재단 대표와 함께(가운데 사진)


작가의 이전글 My story - 소머즈처럼 선 여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