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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19. 2019

Her Story - 아시아재단의 문화지원

UNKRA가 한국 재건 사업을 하는 가운데 우리 부서는 우리나라의 문화 예술을 미국에 알리는 업무를 주로 했다면, ‘아시아재단’은 미국 재단으로 우리나라의 문화예술인들이 국내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경제적, 물질적으로 상당히 많은 지원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전도양양하고 유명하다는 문인, 화가, 음악가들이 도움을 청하고자 사무실로 찾아왔으므로 당시 손꼽는 국내 문화예술계 인물들이나 단체장들, 리더들은 거의 다 만나는 기회를 맞았다. 작가 윤석중, 새싹회, 출판사로는 <자유문학>, <현대문학>, 장준하 씨의 <사상계>, 그리고 기타 출판사들을 지원했다. 아시아재단은 출판사에게 미국에서 종이를 들여와 인쇄할 수 있도록 종이를 대주었다. 음악인으로 지휘자 임원식, 화가로는 김환기, 김기창, 박래현 등 국내에서 손꼽는 무수한 예술인을 지원했고 그들이 해외로 진출하여 활동하도록 도왔다. 청소년 단체를 예로 들면 <걸스카우트 연맹>의 양순담 총재, 김옥라 이사가 세계대회에 참석하고 활동하는 데 무리가 없도록 경제적 지원을 했다. 이상하게도 아시아재단이 지원하지 않은 음악가로 윤이상 선생이 있었는데 지원을 거부당한 유일한 한 명으로 기억된다.

전쟁 전후에 혼란스럽고 불안정하고 모두의 삶이 늘 궁핍하여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급급했는데 이런 상황에서 건축, 토목 분야의 재건, 산업 지원을 통한 경제 부흥과 안정, 농어촌 식량 생산 지원 등 자금이 들어갈 곳은 줄을 섰건만 이런 재건 사업에 문화예술 지원 사업까지 더해진 사실에 나는 가슴 시리도록 놀랍고 감동했다. 문화예술 지원 사업을 하려고 이 험난한 땅에 파란 눈의 사람들이 들어왔나 하는 물음표가 머리 한편에 지금까지도 그려진다. 이때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받은 모든 지원과 도움에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전쟁 시 학업을 이어가며 아르바이트를 했던 <제55 병참 대대>, <콜드 스토리지>에서부터 정직원으로 일했던 <UNKRA>, <아시아재단>, 나중에 이야기할 <걸스카우트 연맹>에 이르기까지 내가 받은 혜택을 어려운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삶을 평생 실천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빚이라 할 수 없는 빚을 파란 눈의 그들, 미국인들에게 지게 된 듯한 기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훗날 나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고 배운 대로 직접 ‘참여자’가 될 수는 없으니 국내외의 후원 기관들을 통해 미약하게나마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 이런 일에는 남편도 항상 의견을 같이했고 의기투합해서 둘이 나섰다. 후에 무뚝뚝한 시아버님의 일화 하나를 귀에서 귀로 전해져 알게 되었다. 시아버님은 비록 교회에는 나가는 실천적 교인이 아니었지만 동네 사람들, 연이 닿은 사람들을 남모르게 도우셨다. 특히 매번 겨울이 오면 어두운 새벽녘에 교회 문 앞에 쌀가마니들을 아무 말 없이 꼬박꼬박 내려놓고 왔다고 전해 들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탓인지 호랑이처럼 건장하고 눈빛이 매섭기도 했으나 남편의 마음은 언제나 여려서 불쌍한 사람이나 곤란에 처한 동물을 보면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자식들도 커갔고 우리 부부의 생활비 외에 크게 지급하는 비용이 점점 줄어들며 여유가 생겨 감에 따라 조금씩 비용을 늘려가며 마음의 정성을 담아 여러 단체에 후원금을 보냈다.

아시아재단 근무시절.
아시아재단 근무 시절
아시아재단 사무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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