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12월 1일, 내 나이 스물여덟에 결혼식을 올렸다. 일하느라 당시로는 늦은 결혼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던 중 결혼하니 직장 업무로 인해 알게 되고 친하게 된 사람들도, 유명한 문화예술인들도 하객으로 오게 되어 뜻깊은 결혼식이 되었다. 남편의 직장인 경희대학교 근처에 신혼집을 마련했다. 결혼하니 집안일도 해야 하고, 출근도 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듬해에 첫 아이도 태어나 결혼한 직장 여성의 일생이 뭔지 확실히 깨달을 만큼 바쁘고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전업주부가 아니었으므로 일하는 사람에게 애를 맡기고 출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아이가 걱정은 됐지만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을 믿었다. 일하는 아이가 똑똑한 아이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당시에는 결혼 후에 일하는 여자들이 드문 편이었는데 나는 일은 꼭 해야지라고 늘 다짐했으므로 그 마음을 따라 전진했다.
입사 경쟁률이 상당히 높아 들어가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보람된 일도 많은 아시아재단을 결혼 후에도 계속 다니고 싶었다. 한 살배기 딸을 집에 두고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직장에 계속 다녔는데, 둘째가 태어나면 아이 둘을 도우미에게 맡기고 회사에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았다. 집안일을 도와주던 가정부가 갓난아이 둘이나 혼자 맡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회사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출산이 임박한 막달까지 일하고는 그만 사표를 냈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다시 직장인의 세계로 돌아와야지 하고 마음먹었다. 일단은 오로지 아이들만 돌보며 지내기로 했다. 요즘 말로 '경력단절 여성'이 되었다. 당시에는 그런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교육을 받은 많은 여성들이 직장 일을 하지 않았고 일을 하다가도 결혼과 동시에 당연히 그만두거나 무언의 압력 아래 그만두었던 시대였다. 경력단절이란 말도 여성 재취업 이행 통계도 존재했는지 아닌지 관심조차 없었다. 어떤 선례를 따라 나의 계획과 실천을 명확히 구체화할 수 없던 시대였다. 나는 모호하지만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나면 꼭 다시 직장을 구하리라는 꿈만 어렴풋하게 품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은 나이인 스물여덟 살에 결혼하여 아이들도 다른 친구들의 자식들에 비해 늦게 태어났다. 네 명을 낳아 키우는 하루하루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시간이 흘렀다. 주어지고 다가온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큰아이들 둘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엄마들의 학급 활동 후원 요청이 들어왔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 홍당무를 근사하게 그렸던 솜씨만 굳게 믿고 학교 게시판을 예쁘게 꾸며주었다. 겨울을 앞두고 학급 아이들이 성탄 트리가 뭔지 알도록 교실에 생나무를 가지고 가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도우미가 있었어도 살림하랴, 남은 어린아이들 둘을 돌보랴 눈코 뜰 사이가 없었다. 직장을 다닐 때나 집안에서 엄마 역할만 할 때나 쉴 짬이 없었다. 뭘 해도 잽싸게 해야 하고 다 해냈다. 아이들이 유아기 때 엄마가 직접 육아를 하는 것이 각별히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9년간 일을 놓고 육아에 전념했다. 막내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다시 일터로 나가야지라고 뇌리에 새겨두어서 인지 그 9년이라는 숫자가 안 잊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