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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상정 댕그마니 Sep 28. 2019

Her Story -나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1969년, 새 직장으로 출근했다. ‘하느님과 나라를 위해 나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항상 다른 사람을 도우겠습니다’라는 걸스카우트의 선서나 10가지 규율은 나의 기본 성향과 잘 맞았다. 나도 규율 그대로 살아가려고 했다. 직원으로 일을 시작했고 금세 승진하여 사무차장, 사무총장 타이틀을 달았다. 취직한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6대 사무총장이 되었다. 승진은 예상외로 쾌속 무드를 탔다. 노력하는 만큼, 하고자 하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부산 피난민 시절에 아르바이트 일거리라도 구해야 했으니 영어 타자를 홀로 익혔고 차후에 한글 타자도 연습했다. 아르바이트 생활에 이어 UNKRA 정직원이 된 후에도 타자를 계속 쳐서 타이핑에는 능숙했고 자신이 있었다. 영어와 일어도 업무를 수행할 정도로 했다. 재취업할 기본적인 필요충분조건은 어느 정도 갖춘 셈이다. 9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손은 다행히 굳지 않았다. 취업의 기준은 모르겠으나 빠른 속도로 경쾌하고 리드미컬하게 귀를 울리는 타자 소리가 흥겨우리만치 듣기 좋았고 이만하면 나도 괜찮은 실력이라고 자위했다. 요새는 타이핑은 기술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취직을 하기 위한 기본 능력 1호가 타자 실력이었다. 타자, 우편, 텔렉스로 업무를 진행했던 이 시절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엉뚱한 초등학생의 미래 상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내 생애에 절대 출현하지 않을 비현실 세계의 물건이었다. 

긴 공백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굳건하고 건재하며 일할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취업한 해부터 엄청난 업무량이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해야 했다. 기틀을 새로 잡아가는 상황이라 새로운 기획들이 태반이었고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길 위에서 이 모든 업무를 진행하고 실천해야 했다. 직원들도 철두철미하게 따라오며 보조를 맞춰주었다. 대원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더 많은 선생님들이 필요했고 전국으로 다니며 스카우트 강사들을 교육했다. 난생처음 하는 일들, 매일 처음 하는 일들이 폭풍우가 몰아쳐 오듯 밀려왔다. 찾아가고 배우면서 하는 거지 별 뾰족한 수가 있지 않았다. 야근할 때는 일을 마무리하고 서둘러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저녁도 쫄쫄 굶고 일한 적도 많았다. 전심전력을 기울여 일을 했다. 어떻게 아이들 넷을 키우며 이런 업무량을 소화해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출근한 지 얼마 지났을 때 사무실 분위기는 검은 구름이 한껏 내리누르는 저기압 상태가 되었다. 직원들의 어두운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신입인 나만 간파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거의 사보타주 무드였다. 그들이 갑자기 사퇴하고 나가버렸다. 나는 왜 나갔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고 나 역시 신참임에도 새 직원을 뽑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나의 입사가 그들의 퇴사에 불씨가 된 것은 아닌가 짐작해본다.

취직하자마자 첫날부터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국 걸스카우트를 이끌고 가면서 해외 걸스카우트와 교류도 해나가야 하니 국내외에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산너머 산으로 몰려오는 일에 둘러싸였다. 아시아재단에서 하던 일 양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일이 뭉텅이로 내게 떨어졌다. 안국동 사무실은 행사 참여, 훈련 강습 등을 이유로 지방 지도자뿐만 아니라 해외 지도자들, 그리고 청소년들로 언제나 북적이고 붐볐다. 사무실에서는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옛 사진들에 나도 직원들도 손님들도 모두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게 신기하다. 아무튼 이곳에서도 역시 신나게 일했고 성취해 나가는 뿌듯한 보람과 하나씩 실천해가는 기쁨으로 일했다는 증거가 남은 사진 속의 웃는 얼굴이 아닐까 싶다. 

입사했던 해에는 내적으로 회사 조직을 정비하고 업무를 파악하고 배우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영국 본사와 전 세계 연맹들과 소통하고 교류 활동도 진행해야 했다. 또한 입사 이듬해인 1970년에 서울에서 개최하는 국제 캠프를 열기로 결정이 내려졌다. 맑은 대낮에 날벼락 맞는 기분이었다. 이제 막 직장에 들어와 일이 뭔지 익히기도 전에 국제 캠프를 개최한다는 것이다. 해본 적도,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일이 내 앞에 뚝 떨어진 것이다.

태릉에서 1970년에 개최한, 해외 여러 나라의 스카우트도 참가하는 국제 캠프를 준비하기에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이런 큰 캠프를 처음 개최하는 만큼 새로 도전하고 시도해봐야 하는 게 관건이었다. 참고할 전례는 없었다. 그런데 조금도 잘못되면 안 되니까 생각하고 점검하고 상상하고 또 점검했다. 우리 아이들은 별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없더라도 매일 낮에 전화해서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런데 전화를 하면 항상 "엄마는 회의 중이에요"라는 말을 수차례 들어야 했다. 내가 생각해도 항상 회의 중이었고, 늘 회의만 하는 것 같았다. 이런 청소년 사업을 밀어줄 든든한 자본도 없었으니 큰일이었다. 그래도 벌여 놓고 나니 청와대, 문교부, 문화공보부, 체신부, 한국은행, 미 8군, 육군사관학교 등 관련 부처에서 흔쾌히 손을 뻗고 도와주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활동이라 이 모든 혜택이 특별히 허락되었다고 본다. 취직 후 첫 대규모 국제 행사이므로 크게 떨렸는데 다들 밀어주어서 손색없이 큰 행사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국내외 어린 대원들과 선생님들을 비롯해 참가자 800여 명이 한여름에 야외에서 먹고 자고 활동하는 8일간의 단체 생활은 내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특히 다치거나 아픈 아이들이 생기면 곤란하여 만전을 기하려고 했다. 몰려드는 일을 어떻게 다 쳐냈는지 의아할 뿐이다.

총회나 훈련 강습으로 지방 대도시로 다녀야 하는 출장은 끊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큰 도시는 안 가본 데가 없을 것이다. 제주도까지 수차례 가서 강습을 했다. 어린 소녀들이 집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활동을 배우고 앞날을 위해 도전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힘들다는 핑계나 꾀병을 부리지 않고 일했는데 학창 시절에 열심히 운동을 한 덕분에 건강이 받쳐 주어 이것도 저것도 모두 시도해본 것 같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UNKRA, 아시아재단, 걸스카우트 연맹에서 또 일하라고 하면 그대로 할 것이다. 즐겁게 일했고 40대까지 열정적으로 보냈다.

1970년 태능에서 개최된 국제 걸스카우트 캠프에서. 나는 가운데 반바지 차림. 
전국으로 지도자 강습 다니던 때. 전라북도 연맹 이사 총회. 나는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이화여자고등학교 서명학 교감 선생님께서 나를  응원차 방문해주셨던 날.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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